석평 유적, 영산강 문화와 섬진강 문화권이 교차함을 확인해줘보성강 유역의 대국으로 발전보성지역 중심부를 곡류하며 전남남부 내륙의 젖줄 역할을 한 보성강은, 영산강, 섬진강과 함께 우리지역 3대 하천에 속한다. 보성강유역 연구는 영산강, 섬진강과 달리 1980년대 중반 주암댐 건설로 수몰된 문덕, 복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실상 방치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광양-목포 간 고속국도 공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보성강 상류 지역의 겸백 석평·미력 송림 마을의 발굴조사는 마한 연맹체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특히 (재)마한문화연구원이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석평마을 유적에서 주거지 167기, 수혈 51기, 지상 건물
가야·백제와 활발한 교류최근 발굴 조사된 구례군 ‘구례 용두리 고분’ 유적에서 가야계 토광묘(목곽묘, 목관묘) 3기와 가야계 토기, 청동기 시대 집자리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목 짧은 단지, 목 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 등 대부분 가야계 토기들인데, 가야의 어느 특정한 시기와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아라가야계, 소가야계, 대가야계 등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구례 용두 마을 강변은 섬진강을 드나들던 배를 매던 ‘배틀재’라는 지명과 선착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이 섬진강을 통해 내륙과 가야 지역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유물들
고대 영산강 유역이 동북아 최대 곡창지대를 이루었다는 것은 무려 155cm에 달하는 신창동 볍씨 압착층이 말해준다. 물론 농업기술의 한계로 논농사가 전체 곡식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농경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이 지역의 특징은 무엇일까?신석기 시대에 조, 수수 등 밭작물이 재배되고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주 가흥리 지역에서 확인된 화분가루는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기존 통설보다 빠른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보다 밭농사의 비중이 컸다. 신창동 유적의 구릉지에는 주거와 공방이 위치한 생활공간과 생산공간인 밭이, 구릉지 하부에는 저습지와 그 근처에 조성된 수전
“유엔세계재활기구(UNWRO) 산하 세계식량위기협약연맹(CGFCF)과 함께 한국을 주관하는 제2새마을중앙회(총재 이도길)가 지구재난에 대한 사전 예방적(Proactive) 차원에서 세계식량계획프로그램을 통하여 한국의 기적인 새마을운동의 프로젝트를 체계화시키다.”유엔세계재활기구(UNWRO) 198개국의 상임의장 김정선과 유엔세계재활기구(UNWRO) 산하 세계식량위기협약연맹(CGFCF)과 함께 한국을 주관하는 제2새마을중앙회(총재 이도길)가 세계중심 한반도 환태평양시대를 열고 갈 세계유라시아횡단대륙철도에 유엔세계재활기구(WRO) 산하 세계각국에 198개국에 한국, 제2새마을운동을 실어 나르게 되었으며, 세계중심 한반도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하여 농어민단체들 및 관련 기업들로 200여개 단체로 구
최근 서울에 거주하는 영암출신 퇴직 공무원께서 전화를 주셨다. 시종지역과 반남지역을 별도의 정치체가 아닌 하나의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전공자로서 사명감이 더해진다.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20여년 간 20여 차례 가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우리나라 발굴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선사시대는 물론 원삼국시대 이를테면 마한 시기까지의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고대 마한인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이곳에 광주광역시가 선사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을 수립하였다고 하니 환영할 만하다. 다만 박물관이 이제까지 단순 전시기능 차원을 벗어나 미국의 유명한 스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백제에 들어와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삼국사기 및 해동고승전 등 사서에 있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사 권위자인 김두진 국민대 명예교수가 지적했듯이, 마라난타 입국 이전에 이미 영산강 유역 및 영광 일대를 비롯하여 마한 여러 지역에 초전 불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국적으로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사찰이 불회사를 비롯하여 영광 불갑사, 담양 용흥사, 군산 불주사, 서울 대성사 등 다섯 군데라고 한다. 주로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마라난타가 한성으로 올라간 길목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영산지중해를 통해 불교가 유입되다 불갑사 사적기 등에는 384년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칠산 바다를
우리 지역의 사찰들이 서로 불교 초전 사찰이라고 하여 관심을 가진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 영광 불갑면에 있는 불갑사가 그 중의 하나인데, 인근 법성면 진내리 지역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라고 알려져 있다. 영광굴비 산지로 유명한 법성포의 지명 또한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 존자가 중국에서 처음 들어온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나주 다도면에 있는 불회사의 일주문에 ‘초전성지덕룡산불회사(初傳聖地德龍山不會寺’)라 하여 초전 사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사찰 가운데 어느 사찰이 초전사찰일까? 왜 두 사찰이 서로 초전사찰이라고 주장할까? 왜 그 사찰들이 우리 지역에 모두 있을까? 그리고 이들 사찰을 통해 불교가 전래된 것을 백제 초전불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등의 여러 궁금함이 생긴다.
도래인 세력을 경계한 율령정부전라남도가 2027년까지 10년간 6천900억을 투입하여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권을 복원ㆍ개발하려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본지의 보도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시절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김해와 고령지역의 가야사 연구와 비교해볼 때 만시지탄의 느낌이지만, 그 지역에서 추진했던 사업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단순한 복원사업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여 보성강까지 포함하여 사업이 추진될 때 진정한 마한사가 복원된다고 믿는다.앞서 행기스님이 중생 구제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 까닭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89년 지통천황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자신의 딸을 문무천황의
일본 불교 공인에 기여얼마 전 왕인박사 현창협회에서 주관한 세미나에서 한 토론자가 왕인박사 영정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였다. 물론 이 견해도 일리가 있지만 필자는 상상의 산물인 영정보다는 왕인박사 관련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에 게재하고, 현재 일본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박사의 후예인 ‘행기’스님 얘기를 ‘날개’ 기사로 처리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몇 년 전 필자가 행기스님 관련 발표를 하며 왕인박사의 후예들이 불교와 관련이 깊다고 하자, 논어를 공부했던 박사의 후손들이 과연 그러했을까 하며 쉽게 동의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일본 불교 공인에 적극적 역할을 하였던 소가씨(蘇我氏) 세력과 왕인 씨족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동대사에 남겨진 행기스님 족적우리나라 경주와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 나라(柰良)시에 일본 화엄종 본찰 도다이지(東大寺)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 사찰은 많은 사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743년에 세워진 이 절은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본당과 한국의 교과서에도 소개된 역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높이 16m의 청동 비로자나불 대불(大佛) 등 일본 국보급 문화재들이 많아 불국사처럼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701년 ‘대보율령’을 완성하며 율령국가체제를 정비하였던 일본은 ‘나라(柰良)시대’를 열었다.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잇달아 편찬되었던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치열한 권력다툼과 흉년, 천연두 유행 등으로 ‘
중계 무역의 거점, 득량만지금도 득량만은 우도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만 가운데 있어 거센 조류를 막아주는 구실도 하여 천혜의 항만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60년대 말 득량만 일대가 제철공업단지 입지선정 당시 포항과 함께 복수 후보지였다는 사실은 항구로서 빼어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백제 부흥 운동이 실패하자 유민들이 왜로 건너갔다고 하는 항구가 이곳 조성 ‘동로성’이었다는 점도 해상 교통로에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설명해준다. 이와 같이 해상 중계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한 초리국은 득량만의 맹주를 넘어 남해안을 장악하는 대국으로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득량만과 가까운 벌교 금평 패총에서 중국의 점술 도구인 복골 등 해남 군곡리 패총 유물과 비슷한 것들이 대량 출토
영암신문은 지난 19일 본사에서 독자위원 5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7년 제2차 독자위원회를 개최했다.양인(영암문화관광해설사. 전 교사), 박기주(전문의용소방대장), 전성원(왕인문해교육사), 김영민(다문화 학습코디 영어강사), 박예찬(영암문화원) 위원이 참석했으며 영암신문과 지역사회 이슈에 관한 토론과 함께 영암신문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는 시간을 가졌다.이번 회의에서는 교육계 관련 위원이 많아 교육문제에 대한 토론과 논의가 활발했다.회의에 앞서 문배근 영암신문 대표이사는 “신문제작과 편집방향에 지역민과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독자위원회”라면서 “평소에 신문을 보고 느꼈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만족스런 부분 등을 평가하면 신문 편집상 위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다사다난했던 2017년 한 해도 저물어 간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전국의 거리를 뒤덮었던 ‘촛불혁명’은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진리를 증명했다.또 급변하는 농업·농촌의 환경은 지역 농업인들에게 시련을 안겨준 한해였다. 이제 시련을 딛고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해야 할 때다. 지난 1년간 지역에서 이슈가 됐던 10대 뉴스를 간추려 보았다. -----------------------------------------------------------------------------------------------------①영암군, 한국지방자치경쟁력 군단위 1위영암군(군수 전동평)이 2016
작은 단위의 정치체가 많아남한 지석묘의 70% 이상이 밀집되어 있는 전남지역 지역묘군은 그 분포 형태나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 경남지역의 경우 여러 취락에서 하나의 지석묘 묘역을 공유한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전남의 동부지역과 득량만 일대의 남해안 지역은 개별 촌락마다 별도의 지석묘군을 만든 것으로 믿어진다. 이를테면 경남지역은 여러 촌락을 하나로 아우르는 큰 정치체를 만드는 것이 용이할 수 있는 반면, 전남지역은 독립된 촌락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단위의 정치체의 출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남지역은 이처럼 소규모 정치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연맹장의 세력도 상대적으로 미약했을 법하다. 이와 관련하여 경남지역에는 길이 10m, 폭 4.5m, 높이 3.5m 무게 35
꿈속의 백발노인 왕건을 살리다덕진포 해전에서 패한 견훤은 반남면에 있는 자미산에 숨어들어 진을 치고 흩어진 병사를 모았다. 이때 왕건은 덕진포 해전에서 운 좋게 승리하고 가까운 신북면 모산에 모여 향후 전략을 짜고 있었다. 그간 견훤과 왕건의 군사는 신북면 호산과 여석산 일대에서 수차례 충돌했지만 전면전으로 어느 한편이 승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전투는 적장의 목을 베면 적이 쉽게 무너지므로 전면전 보다는 은밀한 작전을 통해 적장을 제거하는 것이 전략이었다. 이에 왕건은 수륙양면 협공작전을 계획하고 일부 군사는 모산에 그대로 주둔한 척하고 나머지 군사를 데리고 영암천을 통해 견훤이 있는 수미산 후방으로 진군했는데, 가는 도중 남해포에 들러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하룻밤 진을 쳤다.그런데 이런
역사는 실체파악이 중요지난 호에서 여태까지 백제사의 일부로 인식했던 영산강유역 마한사를 백제와 분리하여 생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한편으로 백제사 중심의 역사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백제 즉 ‘구다라(くだら)’로 인식되고 있는 이 지역의 역사를 굳이 마한사로 분리시키는 것이 어떠한 실익이 있는지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이를테면 영산지중해 출신으로 마한인이 분명한 왕인박사의 ‘전왕인묘’ 묘지 앞에 세워져 있는 ‘백제문’도 ‘마한문’으로 고쳐야 되는 문제와도 충돌하며, 일본문화에 끼친 백제 문화의 비중을 낮게 평가할 수도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진리탐구는 그 무엇보다 바꿀 수 없다는
백제사인가, 마한사인가지난 11월 23일 광주에서 (사)왕인박사연창협회 주최로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동안 이루어진 왕인박사에 대한 연구현황을 살피는 자리에 사가현 간자키시 마쓰모토(松本茂幸) 시장이 직접 와서 지자체 단위로 추진되고 있는 왕인박사 현창 활동도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왕인박사는 백제인인가? 아니면 마한인인가?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발표 중간에 필자는 전석홍 왕인박사현창협회장님과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영산강유역 고대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회장님께서 필자를 격려하며 4세기 후반 전남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6세기 초까지 마한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 있었다는 내용이 혼란스럽다고 하셨다.
‘나의 귀농·귀촌 성공’에서 ‘지역공동체와 더불어 살기’ 모색‘돈되는 농사’에서 ‘안심 먹거리 지역공동체‘로 패러다임 변화 지난 11월 20일 영암 귀농귀촌협회(회장 김선찬)는 이미 관내에 정착하거나 아직 예비단계인 귀농귀촌인 약 6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2박 3일 동안 충남 및 전북 일대의 선진지 견학을 다녀왔다. 보통 귀농귀촌인들은 자신들이 농촌에 잘 정착하기 위한 농업기술 및 농장운영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선진지 견학을 다니곤 한다.그런데 이번 영암 귀농귀촌인들의 선진지 견학은 단순히 자신들의 농장이나 가정의 정착과 성공을 넘어서 영암지역사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마을가꾸기 사업 및 로컬푸드사업’으로 시야가 확장된 점이 돋보였다. 이번 2박3일 견학은 일체
소·벼·불루베리·농가식당 가족 모두가 책임 경영연간 방문객 45,000여명에 연매출 12억원 달해 가족 경영체의 농가식당박진도 교수가 대표로 있는 지역재단의 정명회 일본연수단과 함께 일본 규슈지역 연수일정에 함께 했다. 주로 농협 조합장이 주축이고 직원들도 참석했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서 남서쪽으로 2시간 정도 가서 11시경 오이다현 고코노에마치에 있는 베벵코라는 농가식당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규슈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구주(九重ㆍ구중)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동쪽은 유후인(湯布院ㆍ양포원), 남쪽은 구마모토(熊本ㆍ웅본) 현(縣)에 접하는 곳이다. 표고 900m 한다(飯田ㆍ반전) 고원지대의 중앙에 위치한다. 이 지역에서 252호의 농가가 육용우 4천600두를 사
지난 호에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왕인박사가 어떻게 그려져 왔는가를 검토하며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왕인박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었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왕인박사에 대해서는 우리 보다 일본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왕인박사를 인식하고 있었을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교과서의 서술내용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왕인박사의 역할이 강조된 일본 메이지 교과서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근대국가로 본격 들어가고 있었던 일본은 역사연구 및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 정비와 더불어 조선을 비롯하여 대륙 침략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때 일본고대 사회를 문명국가를 이끄는데 공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