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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적극 받아들이다
불갑사 사적기 등에는 384년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칠산 바다를 거쳐 법성포항에 상륙하여 불갑사를 최초 창건했고, ‘법성(法聖)’이라는 말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사진은 법성포항 전경과 불갑사에 있는 마라난타 존자상(아래)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백제에 들어와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삼국사기 및 해동고승전 등 사서에 있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사 권위자인 김두진 국민대 명예교수가 지적했듯이, 마라난타 입국 이전에 이미 영산강 유역 및 영광 일대를 비롯하여 마한 여러 지역에 초전 불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국적으로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사찰이 불회사를 비롯하여 영광 불갑사, 담양 용흥사, 군산 불주사, 서울 대성사 등 다섯 군데라고 한다. 주로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마라난타가 한성으로 올라간 길목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산지중해를 통해 불교가 유입되다
 

불갑사 사적기 등에는 384년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칠산 바다를 거쳐 법성포항에 상륙하여 불갑사를 최초 창건했고, ‘법성(法聖)’이라는 말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사적기처럼 법성포를 통해 입국한 후 서해안을 따라 한성으로 올라왔을 경우와 백제의 수도와 가까운 당항포 쪽에 도착한 다음 한강을 거슬러 한산주에 이른 경우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동국대 김복순 교수는, 384년 7월 동진에 들어간 사신들과 함께 9월에 귀국한 마라난타가 법성포를 거쳐 한성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불갑사와 불회사를 창건한 후 한성으로 갔다는 사적기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백제 사신들이 7월에 진에 들어갔다가 9월에 귀국했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마라난타가가 진에서 마한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을 참고할 때, 오히려 미리 입국해 포교활동을 하다 한성으로 올라갔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말하자면 백제 침류왕의 초청이 아니라 마한 연맹왕국의 초청으로 들어왔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마라난타가 불교를 처음 전래하였다는 일부의 이해는 바로 잡아야 한다.

마라난타가 영광지역으로 입국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라는 김두진 교수의 의견도 있지만, 필자는 법성포보다는 영산지중해 포구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물론 법성포라는 명칭이 붙여지기 이전에 ‘아무포(阿無浦)’ ‘부용포(芙蓉浦)’라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 명칭이 사용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이 불교 유입과 깊은 인연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중국, 왜, 가야 등 외국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였던 국제 무역항들이 즐비한 영산지중해를 통해 중국의 불교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특히 앞서 인용한 ‘호승 마라난타가 마한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기록 또한 내비리국과 같은 영산지중해의 연맹왕국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곳으로 입국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때 불교의 특징이 해상을 통해 유입된 남방불교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도 영산지중해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법성포는 불갑사를 세운 마라난타가 한성으로 왕래할 때 이용한 항구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마한남부 연맹 불교는 중국남조의 성격


한편 곡성군 도상면 길상암 나한전 중수기에 “이 절이 서진 혜황제(263-307) 때 당승 원명법사가 와서 창건했다”라고 적혀 있다. 영조 5년(1729)에 작성된 같은 곡성지역 관음사의 ‘관음사사적’에 백제 분서왕 3년(300) 성덕보살이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절을 지었다는 창건설화도 있다.

이처럼 4세기 전후한 시기, 즉 서진에서 동진으로 넘어가는 때에 곡성지역에 불교 초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승되고 있는 까닭이 궁금하다. 3세기 말 침미다례 등 마한남부 연맹왕국들이 대규모 사절단을 서진에 파견한 사실이 있었다. 목지국이 백제에게 멸망한 후 마한 연맹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남부연맹과 북부연맹 세력들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영산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한남부 연맹체와 중국의 교류가 확대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무렵 서진이 선비족의 공격을 받자 상당수 중국인들이 문화의 개방성이 높은 이 지역 마한 땅으로 이주를 서둘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불교가 영산지중해 일대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고 본다. 이때 유입된 불교의 성격에서 4세기 중국남조 불교의 특성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용적인 지역성과 무불융합적인 불교사상

영산지중해의 연맹왕국들은 고유성을 견지하면서 외래문화를 포용하려는 특질을 지녔다. 이러한 분위기가 새로운 사상인 불교가 유입되는 환경을 만들었을 법하다. 실제 마한지역에 처음 들어온 불교는, 원래 노장사상과 결합하며 불경을 이해하려는 중국 남조의 격의불교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토착문화와 마찰이 적었을 법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韓傳)에 “여러 나라에 각기 별읍이 있는데 이를 소도라 하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을 달고 귀신을 섬기듯이 한다. 소도의 풍속이 마치 ‘부도(浮屠)’와 같다”고 한 것은 무불융합(巫佛融合)적인 초기 불교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광군조에 다른 지역에 없는 ‘풍속으로 귀신을 믿는다(俗信鬼)’라는 기록이 유독 보이는데, 이는 그 지역의 토착적 전통이 그만큼 강했다고 여겨진다. 이들이 무불융합적인 불교사상을 통해 차츰 불교를 믿게 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포용적인 지역성과 무불융합적인 불교사상이 결합되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는 초전 불교의 모습이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현실적인 까닭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 각훈의 해동고승전 마라난타전에 “세상의 유민(流民)들은 거스르는 성질이 아주 많아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도 하며 나라의 법령에 따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단 들어보지 못했던 일을 듣고, 보지 못했던 일을 보았을 때에는, 즉 지금까지 잘못된 것을 모두 고쳐 선(善)으로 옮기고 진(眞)을 닦아 내면으로 향하니 이것은 때를 잘 따른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왕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고 법령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기록이 마라난타가 국내에 있을 때의 사실이라면 4세기 후반 마한에서 활동할 무렵으로 마한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계율을 강조하는 마라난타 불교사상

마라난타의 불교의 특징이 계행 강조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마라난타가 살았던 당시 동진 사회는 계율을 엄히 지킨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가 마한 지역 사람들이 왕명을 잘 따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국왕 중심의 결속력이 미흡하였던 당시 사회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라 여겨진다. 실제 마한남부 연맹 사회는 백제 중심의 북부연맹에 비해 연맹간의 세력 차이가 크지 않아 분립성이 강하게 형성되어 결속력 또한 상대적으로 미약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촌리 9호분 금동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점차 왕권을 강화하려는 연맹왕국 국왕들에게 통합적 사상을 강조하는 마라난타의 불교사상이 관심을 끌었을 법하다.

이러한 통합과 질서를 강조하는 남조 불교 사상의 특징은 이미 마라난타가 입국하기 이전 초전 불교 사상에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연맹왕국들은 불교 유입에 긍정적이었고 사찰 건립 등을 후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침류왕이 불교를 수용하려 하자 “윗사람들이 좋아하니 아랫사람들도 교화되어 불사를 크게 일으켜 함께 칭찬하고 받들어 행하였다.

이에 불법의 전파는 마치 파발을 두어 명을 전하는 것 같이 빨랐다. 왕 2년 봄에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출가시키니 왕이 법사를 존경했기 때문이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마한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전남 지역에 초전 불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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