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제10호 목포-광양 구간에 위치한 보성 도안리 석평 유적에서 축조 중심연대가 3세기로 추정되는 주거지 140여 기와 지상 건물지 4동, 토기가마 2기, 수혈유구 22기, 구상유구(溝狀遺構:도랑 같은 유적) 7기 등이 확인됐다. 사진은 석평 유적 전경.

가야·백제와 활발한 교류

최근 발굴 조사된 구례군 ‘구례 용두리 고분’ 유적에서 가야계 토광묘(목곽묘, 목관묘) 3기와 가야계 토기, 청동기 시대 집자리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목 짧은 단지, 목 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 등 대부분 가야계 토기들인데, 가야의 어느 특정한 시기와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아라가야계, 소가야계, 대가야계 등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구례 용두 마을 강변은 섬진강을 드나들던 배를 매던 ‘배틀재’라는 지명과 선착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이 섬진강을 통해 내륙과 가야 지역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유물들이 백제와 가야의 교류를 살피는 귀중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마한 동부 지역의 경우 마한계 주거 양식인 4주식 형태와 영산강 유역의 집 자리인 방형이 나타나는 등 마한계 특질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 백제의 세력권으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번 구례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 지역의 마한 연맹체가 가야를 비롯하여 백제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증거라고 살핌이 타당하다고 본다. 결국 마한 연맹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한 좋은 사례라 하겠다.
 
지석묘 소국의 존재 증명

전남 지역의 3대 하천으로 서남쪽으로 흐르는 영산강을 비롯하여 중부에서 내륙으로 역류하며 섬진강과 만나는 보성강,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이 있다. 이들 강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체들을 결성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 중에서도 낙랑과 가야 사이에 위치하며 많은 지천과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많은 대국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남 지역의 다른 곳에 있는 정치체들도 함께 살필 때 우리 지역 전체 특성들이 제대로 드러나리라 기대한다. 이는  영산강 유역 나아가 마한 남부 연맹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보성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복내(福內)는 장흥 관산, 고흥 동강 일대와 더불어 전남 지역에서 가장 많은 지석묘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조사된 보성 지역의 지석묘는 191개 소, 1570여 기에 달하지만, 조사를 할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지석묘가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집단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족장의 무덤이라고 알고 있는 지석묘들이 이렇게 많은 까닭이 언 듯 이해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지석묘를 조영한 것만을 가지고서 족장층이라고 단정할 수 없게 한다. 어쩌면 이곳에서 지석묘를 묘제로 광범하게 사용하였던 것은 지석묘로 이용되는 돌들이 많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반 백성들도 지석묘 이용

 

보성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복내는 장흥 관산, 고흥 동강 일대와 더불어 전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지석묘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보성 옥마리 지석묘.

지질학적으로 영남 육괴에 속한 보성지역은,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 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이때 쏟아진 엄청난 화산석들이 응회암 계통의 크고 작은 바위들을 만들었다. 보성 지역 지석묘 상당수가 응회암이라는, 전남대 허민 부총장의 설명은 이와 관련하여 시사적이다. 보성강 유역에 이러한 돌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심지어 일반 백성들까지도 무덤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이 지역의 지석묘가 마지막 단계에 오게 되면 부장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를 반영한다. 심지어 채석보다는 바위가 있던 그 자리에 조영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눈에 띤다. 따라서 지석묘=족창층의 무덤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이 지역에 굄돌만 있는 남방식 지석묘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보성강 유역의 지석묘는 191개 소에 1570여 기라고 하는데서, 한 지역에 대규모로 조영된 것이 아니라 소규모로 분산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촌락들이 소규모였음을 알려주는데, 보성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웅치면의 제암산·일림산·사자산 등에서 발원한 보성강은 장흥 장평으로 곡류했다가 보성 노동, 미력, 겸백을 거쳐 북상하여 율어, 복내, 문덕까지 보성 곳곳을 장장 120km를 달리다 섬진강과 만난다. 상류의 노동천, 대련천, 광곡천과 보성천, 미력천 등 많은 지류들이 합류하며 큰 강을 이루는 보성강은, 계상산(580m)에서 발원한 노동천, 봉화산(465m)에서 발원한 광곡천과 같이 높은 산들이 이들 하천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처럼 높은 산악 지대를 흐르는 보성강은 장년기의 당당한 모습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유속이 빨라, 노년기의 느릿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타 지역의 강들과 비교된다.

이 때문에 보성강 유역은 작은 분지나 지류들의 침식활동으로 형성된 소규모 침식평야들이 대부분으로, 영산강처럼 넓은 평야지대가 없어 작은 규모의 읍락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마한 소국들이 산곡에 흩어져 있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사실은 벽옥산(479m) 자락에 있는 옥마리 지석묘군과 최근 조사된 거석리 구주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광곡천이 곡류한 곳에 있는 옥마리와 맞은 편 충적평야에 있는 금호리 두 지역을 아우르는 읍락 단위의 소국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대국 수준의 정치체 형성

한편, 보성지역 지도를 유심히 살피면 좁은 산곡을 헤쳐 곡류하는 보성강 물길이 지나가는 곳에 간간히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곳도 눈에 띤다. 대표적인 곳이 광곡천, 보성천, 미력천 등 여러 하천이 합류하여 강폭이 크게 넓어지며 곡류를 한 미력 화방리 용지등 일대인데, 이곳은 전형적인 범람원으로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일찍부터 큰 취락집단이 형성되었을 법하다. 이를테면 강 반대편 송림 유적과 그곳에서 8km 채 안 떨어진 겸백 석평 유적발굴 조사를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 홍수가 지면 엄청난 퇴적물이 마을 앞 보성천을 통해 보성강으로 합류한 것을 목격하곤 했다. 그 강물이 곡류한 곳에 위치한 화방리 일대는 해마다 이렇게 쌓인 퇴적물과 인근 대룡산과 백운산에서 흘러 내려온 유기질 토사가 보태지면서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었다. 나룻배를 타고 왕래한 추억이 있는 대룡산 건너편 용지등은 ‘活川’에서 유래하여 ‘살래’라고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사어향(沙於鄕)’은 이곳 ‘살래’를 말한다. 말하자면 ‘현’에 버금가는 행정단위인 ‘향’이 있는 것은 이곳에 상당한 세력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또한 화방리 뒷산 백운산 선인봉 아래의 장동마을 일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성터도 주목된다. 이를테면 백제 때 보성 지역을 복홀군(伏忽郡)이라 불렀는데, ‘홀’이 ‘성’을 뜻하는 백제식 음이라는 점과 관련지어 보면 ‘복홀군’의 치소가 이곳에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백제에 편입되기 전부터 상당한 세력 집단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곧, 살래를 중심으로 겸백 석평마을, 미력천과 보성천이 흐르는 인근 도개리와 반룡리 일대까지 아우르는 반경 10km가 넘는 국읍 단계의 대국이 보성강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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