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9>영산강유역 마한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지역 고유의 특질이 반영된 ‘영산강식 토기’는 독자적인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사진은 일본에서 출토된 영산강식 토기.

백제사인가, 마한사인가

지난 11월 23일 광주에서 (사)왕인박사연창협회 주최로 ‘왕인박사 현창사업의 현황과 과제’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동안 이루어진 왕인박사에 대한 연구현황을 살피는 자리에 사가현 간자키시 마쓰모토(松本茂幸) 시장이 직접 와서 지자체 단위로 추진되고 있는 왕인박사 현창 활동도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왕인박사는 백제인인가? 아니면 마한인인가?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발표 중간에 필자는 전석홍 왕인박사현창협회장님과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영산강유역 고대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회장님께서 필자를 격려하며 4세기 후반 전남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6세기 초까지 마한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 있었다는 내용이 혼란스럽다고 하셨다.

11월 17일 국립 나주박물관에서 신촌리 금동관 발굴 100년을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움이 있었는데, 금동관의 성격을 둘러싸고 영산강 재지 수장설과 백제 왕실 사여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던 것도 바로 전석홍 회장님이 품었던 의문에 대한 해석들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발표 때도 필자가 강조했지만, 이병도 박사가 주장한 369년 근초고왕 때 전남 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통설에서 벗어나 자료를 새롭게 읽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은 이러한 점을 의식하며 그동안 필자가 본란을 통해 주장한 내용의 대강을 정리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마한 정복설과 마한론 주장의 한계

2018년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을 기념하는 사업이 광주, 전남·북 광역단체를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백제에 편입되기 전 전라도 지역의 고대사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선사이래 우리지역 자연환경과 역사가 쌓여 이 지역의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전라도 정체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마한사 이해가 중요하다. 3세기 후반 목지국 중심의 마한 연맹체가 해체되면서 한강유역 백제 중심 연맹체와 해남 반도에 있는 침미다례 중심 남부 연맹체가 차령산맥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 고려 초 전라도 행정구역은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전남 남해안 일대가 백제 영역이 되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말하자면 전북과 전남 내륙 지역은 그 이전에 이미 백제 지배하에 들어간 셈이 된다. 백제의 마한 정복설 주장은 1959년 이병도 박사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을 근거로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 영산강 유역에 집중된 옹관고분이 백제식 석실분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6세기 전반까지는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다는 ‘마한론’이 제기되었다. 1995년 전남대 임영진 교수가 주장한 마한론은 삼국사나 가야사보다 연구가 취약했던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이 지역 정체성을 실증적으로 찾으려 한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기존 백제 중심의 마한사 입장과 충돌되고 있다.

‘마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4세기 후반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백제가 5세기에 들어 고구려 광개토왕, 장수왕에게 밀린 틈을 이용하여 백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또한 영산강유역 출토유물에 보이는 백제적 요소를 과도하게 해석한 것으로 정복설 논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마한연맹 왕국의 실체를 밝혀야

결국 영산강유역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므로, 이 지역 마한 연맹왕국의 실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전무한 기록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다만 ‘침미다례’ 왕국의 경우, 근초고왕 때 ‘도륙’을 당했고, 중국에 조공갔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되었으나 영산강 유역설, 해남반도설, 고흥반도설 등 위치조차 결론이 나와 있지 않다. 필자는 본란을 통해 다루었지만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등 영산강유역 마한 연맹체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침미다례’가 근초고왕 때 백제 영역이 되었다는 통설은, 백제 지배가 계속되었다면 ‘백제적 요소’들이 영산강 곳곳에 보여야 하나 5세기 말까지 출토유물 성격이 백제계보다는 가야계나 왜계, 심지어 신라계 비중이 크고, 백제가 침미다례를 ‘도륙’ 냈느니 ‘남만’이니 하는 격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다.

3세기 말 ‘침미다례’와 함께 중국에 조공을 갔던 20여 국 실체도 중요한데, 필자는 마한 남부 연맹을 구성한 세력으로 보고 싶다. 이와 관련하여 영암 시종·나주 반남 일대에 거대한 옹관고분을 조영하며 신촌리 9호분 등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환두대도를 사용했던 정치 집단은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지역과 교류를 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규슈, 긴기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유구광구소호’, ‘조족문 토기’, ‘승석문토기’ 등은 일본에서도 ‘백제 토기’가 아닌 ‘전라도 토기’라고 하여 ‘영산강식 토기’ 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이 지역 고유의 특질이 반영된 ‘영산강식 토기’는 독자적인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금동관, 하니와 등 각종 유물에서도 백제, 가야, 왜 등과 교류를 하며 형성된 재지적인 특성이 많이 보인다. 이것은 ‘영산강식 토기’가 다양한 문화 접촉을 통해 탄생한 독자적 산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이곳에는 3, 4세기는 물론 5세기까지도 백제와는 무관한 정치세력이 있었다. 필자가 살핀 ‘내비리국’과 ‘침미다례’ 대국이 그들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 남부연맹이 백제 중심의 북부연맹과 각축을 하였다고 본다.
 
마한 남부연맹 문화도 밝혀야

보성강 유역 비리국, 순천 불사분사국 등도 영산강유역 및 가야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지만, 마한 연맹체의 특질을 기저에 두고 있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성립된 마한 남부연맹은, 연맹내부 및 주변국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개방적 성격과 재지적인 특성이 어우러져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이러한 방향에서 마한사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며, 교과서에도 기술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 가야사 연구처럼 발굴 등 대규모 예산이 드는 사업은 국가 차원에서, 학술적 연구는 지자체가, 지역언론은 지역민 관심을 제고시키는 등 상호 유기적으로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채 최근 지자체들의 마한축제처럼 일회성 보여주기 행사로 머무른다면 교과서 서술은커녕 왕인박사의 도일 사실이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이 지역의 정체성은 그 뿌리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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