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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승(私度僧)이 1천여 명에 달해… 중생들에게 감동을 주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3>고대일본 불교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행기스님(中)
‘대야사(大野寺) 토탑’  일본에서 행기스님이 가졌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727년에 건립된 이 탑은 동변 54m, 서변 54.6m, 남변59m, 북변56.4m, 높이 9m, 13층으로 축조된 거대한 탑으로 조탑에 참여한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본 불교 공인에 기여

얼마 전 왕인박사 현창협회에서 주관한 세미나에서 한 토론자가 왕인박사 영정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였다. 물론 이 견해도 일리가 있지만 필자는 상상의 산물인 영정보다는 왕인박사 관련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에 게재하고, 현재 일본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박사의 후예인 ‘행기’스님 얘기를 ‘날개’ 기사로 처리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필자가 행기스님 관련 발표를 하며 왕인박사의 후예들이 불교와 관련이 깊다고 하자, 논어를 공부했던 박사의 후손들이 과연 그러했을까 하며 쉽게 동의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일본 불교 공인에 적극적 역할을 하였던 소가씨(蘇我氏) 세력과 왕인 씨족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스카지(飛鳥寺)를 시작으로 많은 사찰들도 도래인 후예들이 세웠다. 이를테면 현재의 가와찌(河內) 지역의 후루이찌(古市)고분군 주변에는 왕인박사 후손들이 세운 서림사를 비롯하여 6세기에 새롭게 백제로부터 이주한 왕진이 후계 씨족들이 세운 갈정사 등 씨사(氏寺)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다.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현장스님으로부터 법상종을 공부하고 집 근처 아스카지 선원(禪院)에서 주석하고 있었던 왕진이 후예로 알려진 도소(道昭) 스님의 영향을 받아 출가하였다. 어려서 아스카지 선원을 자주 다녔던 행기스님은 15세 되던 해 도소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다. 말하자면 스님의 출가에는 도래인의 정체성과도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복전사상의 기초를 닦다

한편 도소의 사상체계는 무량의 중생을 교화하며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적멸을 강조한 ‘유가론’과 보살적 행동을 강조한 ‘유식론’이었는데, 나루터 여러 곳에 배가 정박할 선착장을 만드는 등 보살적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도소의 사상이 행기스님의 실천적 복전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행기스님의 복전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단순히 스승의 가르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호에 언급했지만 스에끼 토기를 굽던 많은 도래인들이 거처도 없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삶의 쉼터를 마련해주기 위한 포교당인 ‘대수혜원’을 만들었던 것이 복전 활동을 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스님이 중생구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른바 708년부터 710년까지 계속된 평성경 천도 대공역 사업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근강으로 천도한 지 10년도 채 안된 676년 다시 등원경 천도공사를 18년이나 걸린 공역 끝에 천도하는 등 연이은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백성들은 지쳐 있었다. 게다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후지하라 후히토(藤原不比等)이 ‘대보율령’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국역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백성들은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708년 천도 공역이 시작되자 백성들의 삶은 완전히 붕괴되고 있었다. 당시 “도읍을 만들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동원되었다가 도망간 백성들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하는 기록과 “천도공사에 동원된 역민(役民)들이 귀향하다 식량이 떨어져 길에서 구덩이를 파고 의지하는 자가 적지 않으므로 진휼에 노력하고 사망한 자 이름을 기록하라”는 조칙에서 당시의 참혹한 실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공역에는 이 지역의 도래인과 백제 멸망 후 건너온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  평성경과 가까운 지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목격한 행기스님은 ‘대수혜원’과 같은 원 및 보시옥 등의 구제시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구제하려는 방도를 찾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결합되어 행기스님의 복전(福田) 사상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스승 도소보다 훨씬 더 실천성이 강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중생구제 활동을 실천하다

행기 연보를 보면 상당수 ‘원’들이 723년 이후에 보이고 있어 그때부터 구체적인 구제활동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행기 연보를 분석해보면, 원(院) 49개소, 저수지(池) 15개소, 구(溝) 7개소, 보시옥(布施屋) 9개소 등 건립된 시설들의 구체적인 연도와 명칭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시설들은 총 시설 숫자가 일치하지만 ‘원’의 경우는 원 28, 니원(尼院) 8개소 등 36개소 밖에 없고 시설 연도도 찬자 스스로도 불명(不明)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은 상당수 ‘원’들이 아마도 평성경 천도 공역 때 시설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특히 구제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시옥들이 평성경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행기스님이 평성경 공역으로 쓰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행기스님의 구제활동에 깊이 감동을 받아 귀향을 포기하고 스님과 함께 생활하는 이른바 ‘사도승(私度僧)’이 되었다. 당시 승려들은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도승(官度僧)’이었다. 행기스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1천여 명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의 중생 구제활동이 하층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상상이 된다.

스님은 일본 불교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일본 불교사의 권위자인 타무라 엔쵸(田村圓澄)는 평성경 천도와 그에 따른 공역이 행기스님의 민중 불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수혜원’ 건립부터 이미 시작된 스님의 중생 구제활동이 평성경 공역 때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도래인 후예들의 구심점

한편 스님이 세웠던 많은 ‘원’이나 ‘보시옥’ 등의 운영은 주로 백제계 어쩌면 영산지중해 출신 도래인들의 재정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행기가 세운 ‘49원’ 가운데 상당수가 그 지역 도래계 호족들의 개인 사원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훗날 스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쌓았던 대야사 토탑도 그 지역의 도래계 씨족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세워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스님은 도래인들의 구심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평성경 공역에 지쳐 쓰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구해 ‘궁민(窮民)’ 문제로 난처한 입장에 있던 당시 율령 정부의 고민을 많이 해결해 주었던 행기스님에 대해 당시 율령 정부는 마땅히 감사의 뜻을 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자인 후지하라 후히토는 717년 승니령(僧尼令)을 내려 스님을 탄압하였다.

즉, “절에서 주석하며 불경 공부해야 할 승려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요설을 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니 이를 일체 금지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보잘 것 없는 승려가 요망한 설교를 하여 패거리를 만들고 마치 ‘성도(聖道)’라고 거짓말을 하며 백성들을 유혹하고 있다”며 혹평을 하였다. 이에 대해 僧俗의 접촉을 막았던 율령 정부가 행기스님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썼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승니령이 내려진 후 추가적인 금압 조처도 없었고, 행기스님의 반발도 없었다. 따라서 스님의 포교활동에 불만이 있다면 단순히 포고령만 내리면 될 것을 굳이 ‘보잘 것 없는 승려’라는 혹평을 쓰면서 감정적인 공격을 하였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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