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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내지역에는 백제 때 주 치소(州 治所)가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0>보성강유역의 마한대국, 비리국<中>
보성은 여러 하천이 합류하여 강폭이 크게 넓어지며 곡류를 한 미력 화방리 용지등 일대에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돼 일찍부터 큰 취락집단이 형성되었을 법하다. 이를테면 강 반대편 송림 유적과 그곳에서 8km 채 안 떨어진 겸백 석평 유적지에서 이런 사실들이 확인되고 있다. 위 사진은 보성 송림유적. 아래 사진은 보성강 유역의 비리국 지도

석평 유적, 영산강 문화와 섬진강 문화권이 교차함을 확인해줘

보성강 유역의 대국으로 발전


보성지역 중심부를 곡류하며 전남남부 내륙의 젖줄 역할을 한 보성강은, 영산강, 섬진강과 함께 우리지역 3대 하천에 속한다. 보성강유역 연구는 영산강, 섬진강과 달리 1980년대 중반 주암댐 건설로 수몰된 문덕, 복내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실상 방치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광양-목포 간 고속국도 공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보성강 상류 지역의 겸백 석평·미력 송림 마을의 발굴조사는 마한 연맹체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재)마한문화연구원이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석평마을 유적에서 주거지 167기, 수혈 51기, 지상 건물지 8기, 토기가마 3기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 원형계와 방형계의 주거지 형태가 함께 나타나 전남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의 문화가 교차되는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두 지역의 문화가 상호 교류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그곳에서는 슬래그(slag)가 출토되는 주거지, 토기제작과 관련된 주거지, 수정 가공과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된 주거지 등 생산시설도 확인되어 자급자족적 경제의 모습도 살필 수 있었다. 해남 군곡리 유적, 보성 조성리 유적, 금평 유적, 순천 낙수리 유적, 남원 세죽리 등의 유물상과 유사한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반되는 양상도 보이는 등 석평유적은 1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마한시대의 보성강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보다 앞서 행해진 보성 노동 거석리 지역의 발굴작업 또한 보성강 상류지역의 읍락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지만, 120km 이상 곡류를 거듭한 보성강유역에 대한 전반적인 발굴조사와 종합적인 분석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이 남아 있다. 

복내 지석묘 정치체 존재 확인

 

앞서 살핀 살래 마을보다 하류에 있는 복내 지역은 보성강이 문덕 쪽으로 곡류한 곳에 있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문덕(307기), 복내(398기), 율어(330기) 등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정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고분 밀집도를 통해 각각 독립된 작은 정치체들이 있었다는 것도 헤아릴 수 있다. 물론 그 가운데 세력이 강했던 복내 지역이 그 지역 연맹체 맹주로서의 위치를 강화해나갔을 것이다. 이영문 교수도 일찍이 복내 일대의 지석묘 밀집도에 주목하여 마한 소국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살핀 바 있다. 이는 기록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때 이 지역에 ‘파부리군(波夫里郡)’이 있었다고 하는데, ‘郡’이 설치되었다면 적어도 이전에 ‘국읍’ 수준의 큰 정치세력이 있었을 것이라 믿어진다. 당이 백제를 멸한 후 설치한 ‘분차주’의 치소도 낙안 지역으로 보기도 하지만, ‘분차주는 본래 파지성’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파지’와 ‘파부리’가 음이 비슷하므로 복내가 ‘치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州 治所’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백제 멸망 당시에도 이 지역은 토착세력이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백제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이 대국의 중심지였으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적어도 마한 54국에 그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벽비리국’ 등 견해는 재검토해야

하지만 이 지역 마한 연맹왕국의 실체를 확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학계에서는 복내 지역의 소국이 마한 54국의 하나인 ‘벽비리국’, 또는 ‘불운국’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일찍이 신채호, 정인보, 이병도 선생 모두 ‘파부리군’의 ‘파부리’와 ‘벽비리’가 음이 비슷함에 주목하여 ‘벽비리국’이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을 하였다. 반면, 천관우 선생은 ‘불운국’의 음이 ‘파부리’와 전혀 달라 단정할 수 없지만, 동이전 기록 순서, 즉 낙안에 해당하는 ‘불사지사국(不斯漬邪國)’과 여수에 해당하는 ‘원지국(爰池國)’의 앞에 국명이 위치한 것으로 볼 때 ‘불운국’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주 반남 지역이 분명한 ‘내비리국’ 역시 동이전 기록 순서와도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의 순서에 따른 비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 필자는 선학의 연구와는 달리 위지동이전에 있는 ‘비리국(卑離國)’이 이곳에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고 싶다. ‘비리국’을 충남 서산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사실 ‘비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과 같이 사용되어 평야가 있는 곳에 많이 붙여져 보통 명사화된 명칭으로 54국명에도 여럿 보인다. 비리(卑離)’는 벌판을 뜻하는 벌(伐)=부리(夫里)=평야의 뜻이 있다고 육당 최남선 선생이 언급한 이래 정설화 되어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의 54 국 가운데 ‘비리’ 명칭이 있는 소국을 보면, 필자가 복내에 비정한 ‘비리국’을 비롯하여, ‘점비리국(占卑離國)’, ‘감계비리국(監奚卑離國)’, ‘내비리국(內卑離國)’, ‘벽비리국(辟卑離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등 8곳이나 된다. 이는 소국들이 주로 분지나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복내에는 ‘비리국’이 있었다

‘비리국’을 복내 지역으로 비정하려는 것은 백제 때의 ‘파부리’ 명칭이 통일신라 경덕왕 때 ‘부리(富里)’로 개칭된 사실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덕왕이 ‘파부리’를 ‘부리’로 개칭한 것은 ‘부리’가 원 지명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파’라는 접두어를 붙이었던 것은, 반남 지역의 ‘내비리국’을 절단 낸다는 뜻으로 ‘반’자를 사용하여 ‘반내부리’라 했듯이, 보성강 유역의 대국인 ‘비리국’이 백제에 끝까지 저항하자 ‘파(破)’자를 사용하여 ‘파부리’라고 행정구역 명칭을 바꾸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러한 추측이 설득력이 있다면 복내 지역에 있었던 연맹왕국의 모습은 ‘부리’와 같은 음인 ‘비리국’임이 분명해진다.

이처럼 보성강 유역에는 복내와 화방리 일대에 위치한 대국을 중심으로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산악지대에 가로막혀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탓에 결속력은 미약하였지만 강을 통한 교류는 활발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3세기 후반 보성강 유역의 맹주가 된 복내지역 ‘비리국’으로 점차 통합의 과정을 밟아 갔다고 여겨진다.

‘지석묘의 고장, 보성’이라고 할 만큼 지석묘 밀집도가 높은 보성강 유역은 지형적인 특성에 따라 분포 규모의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80기 이상이 밀집된 율어면 문양리 양지 마을을 비롯하여 인근 율어리 우정 마을(47기), 문덕면 죽산리 하죽(68기)과 동산리 법화(32기), 복내면 일봉리 일와(39기)와 복내리 도화(48기), 시천리 살치(47기) 마을 등 보성강 중류 지역과 상류의 겸백 도안리(40기) 일대에서 밀집도가 높다. 반면 대부분은 노동 금호리와 옥마리 일대(16기)를 제외하고는 5기 미만의 소규모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우연이 아니라 당시 정치세력의 규모의 차이를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보성강 유역에는 대국에 버금가는 세력도 있지만, 읍락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최근 발굴된 도안리 석평 일대는 시굴조사 면적이 92,096㎡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유적과 그 가운데 절반에 달하는 중복 주거지와 공방유적을 통해 적어도 몇 개 읍락을 아우를 수 있는 국읍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인접한 화방리 일대까지 포함하면 2∼3세기 무렵 그곳에 대국이 성립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처럼 지석묘 밀집지에는 큰 연맹체가 성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율어, 복내 지역에는 비교적 큰 연맹체들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율어천 분지에 있는 양지·우정지역은 단일 연맹왕국을 이루었고, 일봉천과 복내천의 넓은 구릉지에 형성된 일와·도와 지역도 서로 각축을 하였지만, 곧 통합과정을 거쳐 대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본다.                
 

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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