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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평야와 발달한 농기구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7>고대 동북아 최대 곡창지대, 영산지중해 유역(上)

최근 서울에 거주하는 영암출신 퇴직 공무원께서 전화를 주셨다. 시종지역과 반남지역을 별도의 정치체가 아닌 하나의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전공자로서 사명감이 더해진다.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20여년 간 20여 차례 가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우리나라 발굴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선사시대는 물론 원삼국시대 이를테면 마한 시기까지의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고대 마한인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이곳에 광주광역시가 선사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을 수립하였다고 하니 환영할 만하다. 

다만 박물관이 이제까지 단순 전시기능 차원을 벗어나 미국의 유명한 스미소니언 박물관 유물들이 밤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가상하여 제작된 '박물관은 살아 있다'라는 영화처럼 스토리텔링하여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VR(가상현실)로 만들어내면 훨씬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창동 유적, 최대 곡창지역 확인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것들이 많다. 그 가운데 ‘최초’와 함께 ‘최대’라는 수식어가 함께 딸려 있는 유적이 있다. 1992년 신창동의 저습지 유적 토층에서 확인된 규모가 무려 두께가 155cm나 되는 벼 껍질 압착층이 그것인데, 역시 두께가 70cm 정도인 중국 허무두 유적과 비교해보더라도 대단한 규모여서 동북아 최대의 벼 생산지였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압착층 면적을 분석하여 이 지역의 벼 수확량이 대략 500톤 정도로 추정된다는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농업 생산력 수준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유적을 통해 논벼와 밭벼가 함께 경작되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부여의 송국리 유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지지 않았던 탄화미 흔적도 대규모로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신창동 유적처럼 영산강이 크게 휘감아 도는 곡류부분 아래에 위치해 있어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있었던 영산강유역의 다른 충적평야들도 이와 같이 높은 농업 생산력을 유지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영산강유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이 벼농사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시대 벼농사 가능성 확인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에 밭농사가 시작되고, 청동기 시대에 벼농사가 나타났다고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1978년 나주 다시면 가흥리 영산강유역 습지에서 채집한 화분을 탄소 측정 연대로 살핀 결과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벼가 재배되었다는 흔적이 찾아져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물론 관련 고고학적 유물이 동반되지 않은 것은 한계로 여겨지지만, 탄화미가 출토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도작문화 유적지라 여겨졌던 경기도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보다 시기가 이른 신석기 후기에 영산강유역에서 도작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말하자면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지금부터 6000년 경 시작된 벼농사가 영산강유역에서 3500여 년 경에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되어도 좋을 것이다. 

즉, 비슷한 화분 검사법을 통해 조사된 같은 한반도 남부지역인 김해 예안리나 울산 방어진 지역의 벼농사 재배 시기가 각각 지금부터 3000∼2000년, 2300년경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나주 다시 가흥리 사례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반도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이해가 설득력이 있다면 벼의 전파경로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영산강유역 벼농사 남방계통

그동안 벼농사의 전파경로에 대해 요동반도를 거쳐 북쪽으로부터 들어왔다는 북방설과 화남이나 동남아에서 우리나라 남부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 그리고 두 설을 절충하는 절충설이 있었다. 만약 영산강유역에서 우리나라 도작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남방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지 않나 한다. 남방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주된 근거가 당시 항해술로 볼 때 양쯔강유역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왔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지만 나타난 현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처럼 영산강유역에서 일찍이 재배되기 시작한 벼농사가 시기가 내려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강의 상류에서 밀려 내려오는 퇴적물이 쌓여 평지가 되었던 까닭으로 벼농사와 같은 습지성 작물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록 목재이긴 하지만 수확과 곡물가공에 사용된 농기구가 동시에 발견된 최초의 사례라고 하는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괭이, 따비, 굴지구, 낫, 절구통 등과 같은 다양한 농구들도 이 지역의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사실은 농사와 관련된 각종 의례가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곳에서 출토된 솟대의 일종으로 해석되고 있는 새(鳥) 모양의 목제품은 벼의 수확이나 가공 등과 관련된 수변 의례와 관련된 것이라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항상 5월에 파종을 마치면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한 기록을 입증해주는 이곳에서 출토된 제기들로 추정되는 수많은 토기들은 농경과 관련된 제례의식이 성행했음을 확인해준다.

한편 해발 20m의 영산강 범람원에 의해 형성된 배후습지와 구릉하부의 저지가 연접한 곳에서 논 유적이 1998년 발굴에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는 점토대토기 단계의 토기 파편과 탄화미 등도 섞여 있어 이 지역에서 논농사가 발달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논과 밭에서 재배된 벼농사가 당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을까?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목재 낫 유물에서 대략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는 철제 농기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임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낫의 사용은 수확방법이 개선되고 재배면적이 확대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괄목할만한 종자개량이나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증가하는 등 재배기술이 발달했다고 볼 수 없다.

이상기온과 저습지 농사의 한계

그것은 신창동 유적에서 검출된 벼 껍질 층에서 채취한 토양 샘플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 벼에서 개화 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직 여물지 않은 쭉정이가 다량 발생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농구 등의 발달과 함께 벼 재배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기후 현상에서 비롯되는 자연재해 내지는 저습답에서 발생하기 쉬운 뿌리가 썩는(根腐) 현상 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AD 1∼2세기에 한반도에 닥친 냉해와 재배기술의 한계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농기구의 발달을 통해 농경이 가능한 지역에 대한 벌채와 개간이 이루어져 농경지가 확대됨으로써 쌀 생산량이 증대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한편, 도작 농경의 비중이 점차 커져갔다고 하더라도 쌀이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도작농업이 발달했다고 하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쌀 생산량은 휴경지 비중과 미숙미의 비율이 높아 당시 1년 식량 소비량의 3.3개월분에 불과하였다는 연구는 참고된다. 말하자면 당시 밭작물의 비중이 상당했던 우리나라의 경우를 고려할 때 도작농업에서 생산되는 비중이 우리가 기대한 만큼 많은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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