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1>득량 지중해의 맹주 ‘초리국(楚離國)’(下)

방사유적이나 안동고분 등에서 여러 문화요소들이 보이는 것은 지역을 장악한 초리국 연맹왕국이 왜·가야·침미다례와 내비리국·백제 등과 활발한 교역을 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계 무역의 거점, 득량만

지금도 득량만은 우도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만 가운데 있어 거센 조류를 막아주는 구실도 하여 천혜의 항만 조건을 갖추고 있다. 1960년대 말 득량만 일대가 제철공업단지 입지선정 당시 포항과 함께 복수 후보지였다는 사실은 항구로서 빼어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백제 부흥 운동이 실패하자 유민들이 왜로 건너갔다고 하는 항구가 이곳 조성 ‘동로성’이었다는 점도 해상 교통로에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설명해준다. 이와 같이 해상 중계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한 초리국은 득량만의 맹주를 넘어 남해안을 장악하는 대국으로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득량만과 가까운 벌교 금평 패총에서 중국의 점술 도구인 복골 등 해남 군곡리 패총 유물과 비슷한 것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그보다 2배 넓은 인접한 조성리 패총은 아직 발굴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단언할 수 없지만 이와 비슷할 것이다. 해남 군곡리 패총의 화천, 여수 거문도 오수전, 창원 성산패총의 오수전, 김해 회현리 패총의 화천 등 남해안의 연안항로 상에 위치한 곳에서 중국 화폐들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득량만 일대에서도 이들 화폐들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득량만 일대는 일찍이 중계무역의 거점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발달한 농·어업 및 해상무역을 통해 확보된 득량만 연맹체의 경제적 부는 보다 큰 정치체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초리국이 득량만 연안 연맹체의 중심세력이라는 사실은 인근 지석묘군 가운데 민등 고분군에 있는 지석묘가 가장 규모가 크고, 그곳에서 불과 5km 떨어진 남양면 중산리 지석묘군에서 출토된 석검의 길이가 무려 43.3cm로 전남지역에서 가장 최대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초리국이 연맹체들의 통합을 주도했을 법하다.

득량 지중해의 길목, 방사마을

최근 초리국 중심지와 가까운 풍양면의 방사와 한동 마을에서 주거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물들은 일찍부터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주지만, 규모면에서 대국에 미치지 못한 소국 수준의 읍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기존 촌락 위에 4세기에 시작되어 5세기까지 한시적으로 주거지가 새롭게 조영된 흔적이 보인다.

현재는 방조제로 인한 ‘고흥호’가 있는 곳이지만, ‘득량 지중해’ 길목의 만(灣) 안에 있는 방사 마을은 과거에는 왜, 가야, 낙랑 등 외국 무역선들이 왕래하기에는 좋은 포구였다. 방사 유적의 주거지가 보성강과 전남동부 지역에 일반적이었던 원형 형태에서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하던 방형계 형태로 바꾸어지고, 주로 충청·전라 지역에 출토되었던 토제 연통과 소가야 계통의 고배(高杯), 왜(倭) 계통의 모자곡옥(母子曲玉) 등이 출토되는 등 토착적 문화 요소보다는 이웃 나라와 교류를 통해 유입된 문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3세기 후반 초리국이 연맹을 통합한 사실과 4∼5세기라는 특정시기에 주거지가 조성된 것을 연결지어 보면 이해가 된다. 말하자면, 초리국이 팽창하면서 이곳 고흥반도 남단의 방사마을이 새로운 포구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방사마을 반대편 해창만에 있는 안동고분도 그 조영 시기가 5세기 중엽이라는 점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초리국은 ‘득량 지중해’를 넘어 고흥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조성리의 득량만과 고흥반도 일대에 별도의 정치체를 설정한 바 있는 임영진 교수는 고흥반도 남단의 서부 풍양면 일대와 동부의 도화면 일대에 ‘침미’와 ‘다례’의 두 연맹체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고흥반도의 밀집된 지석묘군과 21기나 되는 삼국시대 고분들, 특히 금동관, 금동신발 등이 출토된 포두면 길두리 안동고분에 주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 고분의 피장자가 재지 세력이라고 필자도 생각하고 있지만, 그 주변에 전통적인 지석묘군도 없는데다 그 고분 하나만 있고, 심지어 출토유물에서 일상 용품이 전무한 사실은 이 지역에 토착세력의 존재 가능성을 상정하기 어렵다. 안동고분이 있는 해창만과 서부 풍양면 일대는 지금은 대규모가 간척지가 형성되어 있지만,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들은 비교적 급경사의 산지를 흘러내려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대규모 연맹왕국이 형성될 정도의 넓은 평야도 없었다. 따라서 그곳이 마한남부 연맹을 이끌었던 대국 침미다례의 중심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초리국을 중심으로 득량만 연맹체들은 지석묘를 오랫동안 주 묘제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보성강·섬진강 유역 등 전남 동부지역과 동일한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민등 고분군과 가까운 두원면 운대 지석묘에서 출토된 요령식 동검과 천하석제 소옥, 유경·유병식 석검 등이 주암댐 수몰지구인 승주 우산리와 여수반도의 적량동·평여동 유적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유사한 점은 이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조성리 출토토기들 대부분이 재지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 점도 토착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초리국 연맹왕국은 교역의 확대와 더불어 외부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조성리 유적에서 소가야 계통의 발형기대와 삼각투창고배가 출토되고 있고,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성 동쪽 13리에 ‘가야산’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득량만은 어떤 형태로든지 가야와 접촉이 있었을 법하다. 다만, 이때 가야토기 양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었다고 볼 수는 없고, 단순한 경제적 교류 내지는 문화 접촉 수준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원형의 주거형태, 방형으로 변화

득량만 연안과 전남동부 지방에 많이 나타난 원형 중심의 주거형태가 4세기에 들어서서 영산강유역에서 주로 유행되던 방형으로 변화가 나타났고, 동시기에 나타난 토기들을 보면 섬진강 상류와 보성강 유역, 전북 서해안과 보성강 유역, 영산강 하류와 보성강 유역 등이 상호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 지역의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함께 찾아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하하는 백제 연맹체에 대응하려는 침미다례 중심의 마한남부 연맹들이 정치적으로 상호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하튼 폐쇄성이 강하였던 보성강 유역에 다른 지역의 문화가 용해되는 현상은 가야와 교섭을 통해 발전을 모색하던 초리국 연맹체가 침미다례 및 내비리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초리국 연맹체는 보성강 유역 연맹체보다 훨씬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한편, 방사유적의 모자곡옥에서 보이는 왜계 요소 및 안동고분의 금동관, 금동신발에서 보이는 백제적 요소와 갑주에서 보이는 왜계 요소 등은 이들 지역이 중계 무역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안동고분의 금동관·금동신발 등이 백제적인 성격이 있다 하여 지방기구인 담로가 설치되는 등 고흥반도가 백제의 통치체제에 들어갔다고 보기도 하지만, 근초고왕의 공격은 침미다례에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이다.

특히 안동 고분의 피장자의 성격이 그 지역에 한시적으로 존재하였던 재지 세력이라는 사실과 고분 형식이 같은 수혈식 석관묘이긴 하지만 당시 매장시설, 분구의 구조, 출토유물 등 여러가지 점에서 백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방사유적이나 안동 고분 등에서 여러 문화요소들이 보이는 것은 이 지역을 장악한 초리국 연맹왕국이 왜, 가야,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백제 등과 활발한 교역을 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러한 경제적인 교류를 정치적 영향력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유의해야 한다.

득량만의 맹주 초리국은 남해안의 맹주를 자처하며 발전을 하였으나, ‘영산강식 토기’와 같은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는 영산강 유역이나 가야에 비해 정치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두 지역의 점이 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살피는 것이 옳겠다. 방사·한동의 주거지가 5세기를 정점으로 더 이상 조영된 흔적이 보이지 않은 것은 6세기에 들어 백제가 섬진강 줄기의 임나사현(任那四縣)을 차지하여 여수반도가 새로운 교역 거점으로 등장한 때문이며, 이제 초리국도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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