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고대일본 불교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행기스님(下)

7세기 초 축조된 오사카부 사야마(狹山)시에 위치한 관개용 저수지인 ‘사야마이케(狹山池)’는 둘레 약 3㎞, 면적 약 36㏊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댐식 저수지이다. 행기스님에 의해 처음 개수되어 1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은 댐의 단면도.

도래인 세력을 경계한 율령정부

전라남도가 2027년까지 10년간 6천900억을 투입하여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권을 복원ㆍ개발하려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본지의 보도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시절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김해와 고령지역의 가야사 연구와 비교해볼 때 만시지탄의 느낌이지만, 그 지역에서 추진했던 사업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단순한 복원사업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여 보성강까지 포함하여 사업이 추진될 때 진정한 마한사가 복원된다고 믿는다.

앞서 행기스님이 중생 구제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 까닭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89년 지통천황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자신의 딸을 문무천황의 왕비로 세우며 권력을 장악한 후지하라 후히토는 701년 대보율령, 718년 양노율령 등을 시행하며 강력한 율령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이런 그에게 행기 집단이 비록 궁민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많은 도래인들과 백제계 망명인들이 살고 있는 하내국, 대화국, 화천국 등지에서 ‘도래인’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대승정기’에 실린 행기스님의 제자들 12씨족 가운데 8씨족이 화천국, 4씨족이 하내국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스님과 혈연적·지연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강력한 율령체제를 강화하며 중앙집권체제를 추진한 후지하라에 맞서는 지방호족 세력의 구심점 역할도 하고 있었던 행기스님을 통제하려 했을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사야마이케 박물관에 있는 행기스님의 좌상.

금압령을 이겨낸 복전사상

그렇지만 이러한 율령정부의 스님에 대한 탄압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722년 당시 정부가 “요즘 승니들이 계율을 연마하지 않고 천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감언을 퍼트리며…”라고 다시 승니령을 내리고 있는데서 스님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5년 전인 717년 승니령이 내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718년 대화국에 융복원(隆福院), 720년 하내국에 석응원(石凝院) 등 구제시설을 잇따라 세웠다.

이를테면 중생구제 실천을 가장 중시했던 스님에게 금압령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에 걸친 스님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1천여명이었고, 마을을 지나면 어린이들까지 달려나와 ‘행기스님이 오셨다’고 환호하고 앞다퉈 참배를 하려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특히 “행기大德이 난파의 강을 뚫어 나루터를 만들었는데 법설로 감화시키니 도속귀천(道俗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참여하였다”는 ‘영이기(靈異記)’의 내용에서 ‘승속일체(僧俗一體)’된 스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금압을 이겨내며 더욱 세력을 확장해가는 스님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나온 2차 승니령은 1차 때와 비교해보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스님은 금압령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은 채 오로지 중생구제 활동에만 매진하였다. 723년 청정토원·청정니원·구수원원 등 구제시설을 잇따라 건립하는 등 729년까지 10여곳 이상 되는 곳에 세워진 구제시설 ‘원’을 비롯하여 저수지 15개소, 구거(溝渠) 9개소, 교량 6개소 등 민중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시설들을 적극적으로 만든데서 알 수 있다.

특히 “스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만들고 보를 쌓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태니 불과 며칠 만에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는 ‘속일본기’의 기록처럼 일반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민중의 힘, 대야사 토탑

당시 행기스님이 가졌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대야사(大野寺) 토탑’ 건립을 들 수 있다. 727년에 건립된 이 탑은 동변 54m, 서변 54.6m, 남변59m, 북변56.4m, 높이 9m, 13층으로 축조된 거대한 탑으로, 공역에 참여한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금압령 아래에서도 이러한 거대한 탑을 세운 행기스님의 힘에 압도된 율령정부는 마침내 731년 “행기법사를 따르는 우파한·우파이들의 법을 수행하는 자로서, 남자는 61세 이상, 여자는 55세 이상은 출가를 허락한다”라고 하여 행기스님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율령정부의 태도가 변하게 된 것은 스님의 세력을 경계하였던 후지하라 후히토가 720년 사망한데다 724년 즉위한 쇼무천황은 승려들을 궁으로 불러 암송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722년 100만 정보의 개간계획을 발표하며 농지의 사유를 인정하는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 723)을 만들어 경작지 확대에 총력을 기울였던 율령정부로서는 토탑 건설에서 확인한 바처럼 노동력 동원 능력이 있는 행기스님의 도움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이는 금압령이 해제된 이듬해 시작된 유명한 ‘협산지(狹山池)’ 댐 개수사업에 행기스님이 본격 뛰어들어 추진하였던데서 알 수 있다.
 
협산지 개수사업을 추진하다

7세기 초 축조된 오사카부 사야마(狹山)시에 위치한 관개용 저수지인 ‘사야마이케(狹山池)’는 둘레 약 3㎞, 면적 약 36㏊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댐식 저수지인데 행기스님에 의해 처음 개수되어 1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나라(奈良) 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여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던 유명한 댐인데, 이 개수사업은 행기스님이 가졌던 토목기술과 농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역량 때문에 가능하였다. 댐 밑에 세워져 있는 ‘협산지 박물관’에 있는 댐의 단면모형은, 스님이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잘 쌓아 두툼하게 하여 흙벽을 튼튼하게 한 이른바 부엽공법(敷葉工法)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강물을 가로막아 댐(Dam)식의 커다란 저수지를 만드는데 사용된 이 공법은 백제로부터 유입된 고도의 토목기술이었다. 이처럼 백제식 공법의 사용은 행기스님이 도래인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스님이 이 지역의 도래계 호족들의 재정적 후원과 일반 도래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엄청난 규모의 개수사업이 가능하였다. 스님은 이 댐을 개수할 때 당연히 농업용수를 이용할 수많은 도래인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협산지 개수사업은 행기스님의 가장 빛나는 중생구제 활동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도래인의 비원, 동대사 대불

집권 초기부터 천연두의 대유행, 대기근에다 장옥왕의 반란 등 정치적 혼란이 연이어 일어나 일본 고대사에서 말하고 있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 재위하였던 쇼무(聖武)천황은 난국을 불교의 힘을 빌어 극복하려 하였다. 가와찌 지역의 ‘지식사’라는 절에서 민간이 자발적으로 만든 ‘노사나불’을 보며 민간의 기술력과 부를 동원한 대불(大佛) 주조를 구상하였던 쇼무천황은, 743년 대불조영 발원조칙과 사지(寺地) 개토식에 이어 745년 행기스님을 ‘대승정(大僧正)’으로 삼아 사업을 총괄토록 하였다. 행기스님에게 대불 조영사업을 맡긴 까닭은 대불을 조영할 재정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쇼무천황으로서는 지식사 노사나불 조영처럼 민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즉, ‘며칠 내에 이루어내는’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과 그 지역 도래계 호족들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스님이 주목되었던 것이다. 이 ‘대불(大佛)’을 주조한 조불장관 ‘국중공마려’의 조부가 일본에 망명한 백제인이었고, 대불 조성에 막대한 경비를 부담한 경복 또한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 후손이었다는 점이 이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경복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금광을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일구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든 도래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던 행기스님은 앞장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대불 조성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행기스님이 ‘대승정’직을 받아들이며 ‘대불’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은 불교계의 위상을 강화하고 중생구제의 이상을 실천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 대불사업에 도래인 및 백제 망명인들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려 한 것은 백제멸망 후 점차 약화되고 있는 도래인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스님의 의도가 있었다.

말하자면 일본불교의 상징이 되고 있는 도다이지(東大寺) 비로사나불 대불조영에는 도래인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스님의 간절함이 있다고 보겠다. 행기스님 사후에 도래인들의 정체성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752년 완성된 대불을 보지 못한 채 749년 행기스님은 입적했지만, ‘승속일체(僧俗一體)’를 실현한 삶은, 왕인박사 후예라는 정체성을 항상 가슴에 묻고 도래인들과 함께 한 오랜 삶이 빚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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