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5>영산강유역 마한 연맹왕국, 불교를 수용하다(상)

나주 다도면에 있는 불회사의 일주문에 ‘초전성지덕룡산불회사(初傳聖地德龍山不會寺’)라 하여 초전 사찰임을 내세우고 있다. 영광 불갑사도 인근 법성면 진내리 지역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라고 알려져 있다.<아래 사진>

우리 지역의 사찰들이 서로 불교 초전 사찰이라고 하여 관심을 가진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 영광 불갑면에 있는 불갑사가 그 중의 하나인데, 인근 법성면 진내리 지역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라고 알려져 있다. 영광굴비 산지로 유명한 법성포의 지명 또한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 존자가 중국에서 처음 들어온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나주 다도면에 있는 불회사의 일주문에 ‘초전성지덕룡산불회사(初傳聖地德龍山不會寺’)라 하여 초전 사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사찰 가운데 어느 사찰이 초전사찰일까? 왜 두 사찰이 서로 초전사찰이라고 주장할까? 왜 그 사찰들이 우리 지역에 모두 있을까? 그리고 이들 사찰을 통해 불교가 전래된 것을 백제 초전불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등의 여러 궁금함이 생긴다. 이러한 의문을 찾아보려 한다.

4C말 이전 유포 가능성 높아

일본은 6세기 후반 불교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반대하는 물부씨와 찬성하는 소아씨 세력 간에 치열한 갈등이 있었고,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토착 귀족세력의 반발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불교 공인을 할 정도로 공인과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테면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그만큼 기존 사상과 마찰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산강 유역에서 새로운 사상 유입과 관련된 흔적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특성을 반영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누차 강조하였지만 왕인박사가 왜에 건너갔던 5세기 전후한 시기 영산강 유역에는 백제는 물론 중국, 왜, 가야, 심지어 신라와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AD67년에 중국 후한에 들어왔던 불교가 4C 후반에 영산강 유역에 이미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백제가 아닌 마한 연맹왕국들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기에 불교가 유입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에는 “(침류왕 원년, 384년) 9월에 胡僧 마라난타가 진나라로부터 이르니,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우하고 공경하였으므로,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승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에는 이때의 상황을 “백제 14대 침류왕이 즉위한 원년 9월에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들어왔다. 왕은 교외에까지 나가 그를 맞이하였으며, 궁중에 모시고 공경히 받들어 공양하면서 설법을 들었다. 윗사람들이 좋아하니 아랫사람들도 교화되어 불사를 크게 일으켜 함께 칭찬하고 받들어 행하였다.

이에 불법의 전파는 마치 파발을 두어 명을 전하는 것 같이 빨랐다. 왕 2년 봄에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출가시키니 왕이 법사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고구려 다음으로 불교를 일으켰으니, 거슬러 계산하면 마등이 후한에 들어온 지 280여 년이 되는 셈이다”라고 보다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들 기록을 중심으로 384년에 백제가 불교를 공인하였다고 하며 백제 초전 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려 하였다.

마라난타 입국 이전에 전파

 

영광 불갑사 대웅전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384년 이전에 영산강 유역의 마한지역에 이미 불교가 유입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67년경이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가 활발하였던 당시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실제 한강변 뚝섬에서 출토된 ‘건무4년(338)’ 명문이 있는 금동불좌상은 그 무렵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와 관련하여 1791년 3월 22일 작성된 나주 불회사의 ‘나한전 상량문’에 “동진황제 혁황제가 즉위하던 해인 정묘년 태화 원년에 희연조사가 처음 창건하였다”라는 기록은 주목되어도 좋다. 정묘년은 367년으로 태화 2년의 착오로 보이는데, 384년 이전에 이미 영산지중해 인근에 사찰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또 다른 불회사 대법당 중건 상량문에는 “최초 창건주 마라난타 존자는 백제의 초조이고 삼한의 고승이다. 교학이 뛰어난 인물이니 그를 버리고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는가? 연대는 동진 태화 원년이다. 제2창건주는 희연조사이다”라고 하여 마라난타를 창건주라 하여 ‘나한전 상량문’과 달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창건주에 대해서는 마라난타와 희연조사가 혼돈되어 있으나 시기는 태화연간으로 백제 불교 공인 이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관심을 끈다.

이처럼 불회사 기록은 384년 이전에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를 뚝섬 출토 불상과 연결지어 보면 384년 이전에 이미 불교가 마한 땅에 들어와 있음은 확실하다. 이와 관련하여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마한으로 왔다”(강남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라는 기록은 이러한 추측을 보다 분명히 해준다. 이는 마라난타가 진에서 들어올 때 백제가 아닌 마한 땅으로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마라난타가 백제 한성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마한 땅에 들어와 포교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1741년 진사 이만석이 쓴 영광 ‘불갑사 고적’에 불갑사 초창에 관해 “불법이 동쪽으로 온 이래 비로소 가람의 건축이 있었다. 최초의 경영은 신라·백제의 초기인 한·위의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새가 허공을 지나듯이 과거의 일이 다 없어 과연 어느 해에 누가 전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불갑사에 전해 오는 고기록인 ‘불갑사중수권시문(佛甲寺重修權施文)’에도 불갑사 노승이 법당의 서까래를 고칠 때 상량을 보니 ‘정원 원년 개조’라는 글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정원 원년 785년에 불갑사를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불갑사가 있는 곳에 사찰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이만석이 말한 ‘한(漢)·위(魏)’ 사이에 사찰이 세워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를 나주 불회사를 희연조사가 367년 창건했다는 것과 연결지어 보면 어쩌면 4세기 중엽 이미 영산지중해 일대에 불교가 광범하게 전파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과 교류했던 마한남부 연맹체

이처럼 마라난타가 마한에 먼저 들어왔다고 할 때 마한 어느 지역으로 들어왔을까? 당시 백제와 마한은 이미 3세기 후반에 중국과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가령 침미다례를 포함한 마한남부 연맹국가들이 중국을 찾아갔다는 기록과 “무제 태강 원년(280)과 2년(281)에 그 主가 자주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7년과 8년, 10년에도 자주 이르렀다. 태희 원년(290)에 동이교위인 하감에게 와서 헌상하였다”라는 진서(晉書) 동이 열전 마한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당시 마한이 중국과 경제적 교류도 활발하였다는 것은 군곡리 패총, 수문포 패총 등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연맹왕국 영역 유적에서 발굴된 복골 등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이 중국과 왕래하였을 때는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심은 당연히 영산지중해 연안의 항구였을 것이다. 영산지중해에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다고 하는 상대포를 비롯하여 패총유적이 남아 있는 수문포, 그리고 회진포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항구들이 많다.

특히 나주 회진포는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그곳은 일찍이 큰 항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창건연대 시기가 가장 앞선 불회사가 영산지중해 지역과 근접한 곳에 있다는 점도 불교가 영산지중해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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