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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한 농업 생산력이 사회 변동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신창동 유적지 전경 신창동 유적의 구릉지에는 주거와 공방이 위치한 생활공간과 생산 공간인 밭이, 구릉지 하부에는 저습지와 그 근처에 조성된 수전이 형성돼 있다.

고대 영산강 유역이 동북아 최대 곡창지대를 이루었다는 것은 무려 155cm에 달하는 신창동 볍씨 압착층이 말해준다. 물론 농업기술의 한계로 논농사가 전체 곡식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농경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이 지역의 특징은 무엇일까?

신석기 시대에 조, 수수 등 밭작물이 재배되고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주 가흥리 지역에서 확인된 화분가루는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기존 통설보다 빠른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보다 밭농사의 비중이 컸다. 신창동 유적의 구릉지에는 주거와 공방이 위치한 생활공간과 생산공간인 밭이, 구릉지 하부에는 저습지와 그 근처에 조성된 수전이 형성되어 있다.
 
배수를 위해 고랑과 이랑을 만들었다

신창동 유적의 지표에서 50cm 아래 흑갈색 부식토 층에서 발견된 밭 유구는 너비 10∼25cm 가량의 모래 띠로 이루어진 5줄의 골이 40∼70cm 간격으로 일정하게 구획되어 있는 형태로 고랑과 이랑이 존재해 있다. 고랑과 이랑을 조성하여 밭작물을 재배하였던 모습은 청동기시대에도 확인된다. 농경문청동기에는 한 사람이 목재로 보이는 따비를 가지고 고랑과 이랑이 있는 네모진 밭을 가는 모습이 나오고 있다.

역시 청동기시대 고랑과 이랑이 확인된 경남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삼국시대 경작지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두 시기의 고랑과 이랑의 조성방향이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청동기시대에는 주로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고랑과 이랑이 조성되었다면 삼국시대에는 강의 흐름이나 등고선과 동일한 방향으로 그것을 조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목재농기구를 주로 사용하였던 시대에는 깊이갈이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호우 등으로 두둑이 무너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강의 흐름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이랑을 만들었던 것이다.

상경(常耕) 단계에 이르지 못한 농업기술
 

신창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변의례에 사용된 새 모양의 목제품.


청동기시대의 밭은 이랑의 폭이 넓고 고랑의 폭이 좁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매년 이랑과 고랑을 교체하며 작물을 파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비 기술이 매우 저급한 당시 동일한 이랑 위에서 연속하여 작물을 파종하였다면 지력 소모가 심해 장기간 휴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농업 생산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영산강유역은 강의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여서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력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신창동 일대에서 보이는 밀, 호밀, 보리 등의 맥류재배 흔적은 이러한 밭작물이 재배되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고대를 치켜들었다 하는데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 그 가락이 마치 중국의 탁무(鐸舞)와 같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면 또 이와 같이 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삼한지역은 5월에 파종을 하고 귀신에 제사 지내며 축제를 하고, 10월에 추수를 하면 다시 제천의식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한에서 농업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로 유명하다.

5월에 파종하고 10월에 추수하는 작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밭농사 보다는 벼농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수십 명에 달한다는 점도 많은 노동력이 수반되는 벼농사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를테면 밭농사 보다는 논농사의 비중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수전농업을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이 무렵 벼농사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일본 야요이 시대의 쌀 생산이 1년 소비량의 3.3개월 정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과 동북아 최대 곡창지대라고 하는 신창동 지역조차 압착층에서 확인된 벼쭉정이 등을 통해 실질적인 벼 생산력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도작 초기단계에서 생산된 쌀은 군장들이 수취하여 제사의례를 수행하는 데 소비될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는 조현종 박사의 지적은 참고할만 하다.

벼농사는 영산강 지류를 중심으로

충적평야를 끼고 있는 영산강유역은 어느 지역보다 논농사가 발달하였을 것이다. 영산강 본류보다는 지류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높은 제방을 쌓아 홍수를 예방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본류보다는 치수가 가능한 지류 주변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영산강 지류의 소하천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되면서 작은 소국들이 형성되어졌다. 영산강유역 대국 내비리국이 시종천과 삼포천 등 영산강 지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고대 영산강유역의 수전 경영의 구체적인 모습은 신창동과 무안 양장리 저습지 유적에서 알 수 있다. 이 유적들은 모두 영산강 본류가 범람할 때 하천의 유수작용에 의해 생간 배후습지에 조성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창동 유적의 벼 껍질층은 이곳에 수전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물론 유적발굴 책임을 맡았던 조현종 박사는 이곳 벼는 수도작보다는 밭에서 재배된 밭벼(陸稻)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지만 아무래도 대부분 수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 고이왕 때 “국인에게 명하기를 남쪽의 못(澤)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가 3세기 중엽 무렵으로, ‘택(澤)’은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있는 소택지나 저수지를 말한다. 말하자면 일찍부터 삼한지역에서 수전농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금도 신창동 유적 인근에 ‘신창제’라 불리는 연꽃으로 뒤덮여 있는 비교적 큰 늪이 있는데, 필자는 이 소택 또한 당시 수전농업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무안 양장리 저습지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수전에 물을 공급한 것으로 보이는 보(洑)로 추정되는 목조 구조물을 통해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수전농업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계곡에서 흘러내린 하천 근처에 논둑 또는 작은 보를 설치하여 수전에 물을 공급했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소택지나 저습지 근처를 개간하고 소하천 등에 간이 보를 만들어 관개가 가능한 곳에 수전을 조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 중심의 소규모 농업경영

최근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수전 모습이 모두 소규모라는 점이 특이하다. 즉, 초기 단계의 수전들은 단위면적이 1평에서 3평을 전후한 크기의 소 구획이고, 해발 25-30m 정도의 구릉 하부에 형성된 곡간부의 퇴적지대를 개간한 것들로 초기단계의 경지이용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대구획의 면적을 조성할 수 있는 농공구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고, 노동력의 투입도 많지 않은, 그러면서 완사면을 효율적으로 경작지화 할 수 있고, 물의 취수와 배수 등 관리가 용이한 곳에서 소구획 수전이 소규모로 조성되고 있는 것을 확인해준다.

한편 마한시기 영산강유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가족장이 성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농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혈연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황토지대로 굳이 철제 농기구가 없어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의 사회구조였다. 이를테면 철기의 제작과 분배를 통한 사회발전 동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권력의 집중화 및 사회계층 분화를 촉진하는데 자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마한지역은 읍락의 우두머리들이 일반 백성들과 잡거하고 있다고 한 것은 군장들의 지배력이 절대화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한편 일본 야요이 시대의 경우 초기에는 비교적 좁은 계곡입구에서 시작된 경작지가 점차 넓고 낮은 충적지대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새로운 경지개간은 지형과 더불어 지형조건에 대응하는 기술발달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생산력을 늘리려는 농민들의 강한 욕구가 경지면적의 확대로 이어졌다. 신창동 지역에서 출토된 마한시대의 다양한 목재 농기구들은 이 지역에서도 농업기술이 점차 신장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곧 부의 집중화로 큰 세력가가 등장하게 되고, 주변 작은 소국들을 통합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보다 큰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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