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왕인박사가 어떻게 그려져 왔는가를 검토하며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왕인박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었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왕인박사에 대해서는 우리 보다 일본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왕인박사를 인식하고 있었을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교과서의 서술내용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왕인박사의 역할이 강조된 일본 메이지 교과서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근대국가로 본격 들어가고 있었던 일본은 역사연구 및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 정비와 더불어 조선을 비롯하여 대륙 침략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때 일본고대 사회를 문명국가를 이끄는데 공헌한 왕인박사에 대한 서술은 조선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과 천황제를 강화하는데 유용하게 기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 역대 교과서에서 왕인박사를 서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메이지 시기인 1891년 발행된 아동용 교과서인 ‘고등소학국사’에 “삼한은 지나(支那)에 연접한 나라이기에 지나와 문학이 같다. 듣자니 신공왕후가 삼한을 정벌하시어 그 나라에 들어가 많은 서적과 문서를 가져오셨다. 삼한은 우리 판도에 들어와 교류가 점차 번성하게 되었다.(중략)아직기는 또 그 나라의 수사 왕인을 추천하였다. 왕인이 내조하여 논어 열권과 천자문 한권을 헌상하였다. 황태자가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처음 아직기, 왕인의 내조에서 비롯하여 조정은 크게 마음을 학사에 두었고 문학을 닦는 자가 많았다”라고 하여 천황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왕인박사가 일본학문 발달의 촉진제였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근세 일본 유학자들이 강조했던 ‘문물 전래의 시조’로까지는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후에도 여전히 수록된 왕인박사

이러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에 해당하는 1912년에 나온 ‘아동용 심상소학일본 역사’ 책에도 “또한 학자, 공인들도 도래하여 이로인해 우리나라는 크게 진보하였다. 그 학자 중에는 백제로부터 온 왕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유명하다”라고 하여 왕인박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내용이 앞서의 경우보다 약간 소략화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에 발행된 ‘소학국사 심상과용 상권’에서는 “응신천왕 대에 왕인이라는 학자가 백제에서 와서 학문을 전하고 기직과 단야 등 직인도 뒤이어 도래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의 위세는 해외까지 넓어져 발전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신공왕후 대신 응신천황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왕인이 학문을 전했다는 내용만 간단히 기술하였을 뿐 평가가 생략되어 있다. 패전 후인 1952년대에 발행된 ‘고등소학국사 상권’에도 “제15대 응신천황 대에는 백제의 박사왕인이 부르심을 받고 논어 등 서적을 바쳤다. 이것이 한학 전래의 시초이다”라고 하여 왕인박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등 그 이전 시기와도 서술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점차 약화되고 있는 왕인박사 서술

그런데 1976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신일본사’에는 “이 무렵 많은 귀화인과 각종 기술이 도래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자도 4세기말에 전해졌다고 한다”라고 하여 본문에서 왕인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각주에 “한자의 전래는 응신천황 때에 백제에서 왕인이 와서 논어와 천자문을 바친 것이 그 시초이다”라고 하여 보충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왕인 관련 서술이 본문에서 사라지고 각주로 밀려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에 발행된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왕인박사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러한 서술 경향은 1991년에 나온 교과서에도 “도래인은 또 한자를 전하고 조정의 기록과 외국과의 서신 작성을 담당하였다. 한자와 함께 유교 서적도 전래되어 서적을 통해 대륙의 발달된 문화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에서 보듯이 계속되어 왕인박사 내용이 생략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계속된 이러한 인식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계속되고 있다.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 모두 “도래인들이 양잠과 직조기술 등 우수한 기술과 방법을 전해주었고, 또한 한자를 시작으로 유교와 불교를 전해주었다”라고 하여 도래인들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된 반면 왕인박사 내용이 빠져 있다.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가운데 학교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는 ‘상설 일본사’(山川出版社, 2006)에도 “이렇듯 조선반도와 중국과의 활발한 교섭 가운데 철기 수에끼의 생간, 직조와 금속공예, 토목 등의 여러 기술이 주로 조선반도로부터 찾아온 도래인들에 의해 전해졌다”라고 하여 왕인박사 내용이 빠진 채 도래인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왕인박사 내용은 본문 아닌 각주로 취급되고 있다.

즉, “일본서기에는 서문씨·동한씨·진씨 등의 조상이 된 왕인·아지사주·궁월군 등의 도래설화가 전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에도 전반적으로 왕인 관련 내용이 교과서에서 누락되어 가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고, 각주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메이지 유신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상세히 서술되던 왕인박사 내용이 차츰 소략화 되어 가다 1970년대 이후에 와서는 왕인박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경우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더구나 ‘상설 출판사’의 각주에 나와 있는 왕인박사에 대한 서술이 현재의 교과서 서술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동안 ‘일본 한학의 시조’라는 관점에서 서술되었던 왕인이 아니라 단순히 성씨의 시조로 격하되고 있었다는 것과 왕인 도왜 사실을 ‘사실’ 이 아닌 ‘설화’로 기술하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이후 왕인박사 관련 내용이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그 비중이 크게 약화되고 있는 까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 건국대 김선희 교수는 ‘왕인’이라는 개인 대신에 ‘도래인’이 강조되는 추세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김교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이지만, 일본에서 왕인박사를 1970년대 이후에 들어 서술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아닌 역사적 실체 파악에 힘을 기울여야
 

왕인박사 탄생지로 알려진 성기동에는 왕인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聖泉)이 있다.

1970년대는 한·일 국교 정상화로 양국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김달수 등 재일교포 학자가, 한국에서는 이병도 등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왕인박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던 당시 우리의 문화가 일본고대 사회를 ‘미개에서 문명사회’로 전환시켜주어 이병도 박사의 표현대로 ‘사부국’으로 불려지게 되는데 왕인박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 한국에서 부각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왕인박사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의 논리에 이끌려가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통의 특색을 넓은 시야에서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애정을 깊게 하고 국민으로서 자각을 기른다”라는 새로운 역사교육 목표를 설정하여 왕인박사 관련 내용을 누락시키거나 ‘사실’이 아닌 ‘설화’로 격하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럴수록 더욱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왕인박사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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