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군 남양면 일대에 있었던 ‘초리국(楚離國)’. 남양면 주변 지역에는 많은 지석묘 군(群)이 분포돼 있다. 동강면 유둔리에 있는 지석묘<사진 아래>

역사는 실체파악이 중요

지난 호에서 여태까지 백제사의 일부로 인식했던 영산강유역 마한사를 백제와 분리하여 생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한편으로 백제사 중심의 역사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백제 즉 ‘구다라(くだら)’로 인식되고 있는 이 지역의 역사를 굳이 마한사로 분리시키는 것이 어떠한 실익이 있는지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영산지중해 출신으로 마한인이 분명한 왕인박사의 ‘전왕인묘’ 묘지 앞에 세워져 있는 ‘백제문’도 ‘마한문’으로 고쳐야 되는 문제와도 충돌하며, 일본문화에 끼친 백제 문화의 비중을 낮게 평가할 수도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진리탐구는 그 무엇보다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주목되는 득량 지중해 연맹체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마한사를 영산강 중심의 마한남부 연맹과 백제 중심의 마한북부 연맹으로 구분하여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마한남부 연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부연맹에 대한 검토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가 침미다례와 내비리국과 같은 영산강유역 정치체들과 함께  마한남부 연맹을 구성하였던 같은 전남지역의 다른 연맹체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영산강유역 중심의 마한남부 연맹의 실체가 보다 분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주목한 것은 득량만 일대의 정치체였다. 그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낙랑-영산강유역-금관가야-왜로 이어지는 무역로의 중간지대에 위치한다는 점과 그곳에 유난히 많은 지석묘군이 분포하여 상당한 수준의 정치체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곳에 해남 군곡리 패총이나 영산지중해 연안에 있는 수문 패총과 같은 패총에서 복골 등이 출토되었던 사실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보성강 상류의 대룡산(420m) 자락에 자리잡은 필자의 고향마을에 큰 바위들이 밀집되어 있는 ‘사래바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 바위가 지석묘라고 하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지만 지석묘 때문에 지명이 붙여진 셈이다. 이렇게 보면 필자 마을은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옹관묘 대신 지석묘가 많아

전남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지석묘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조사된 것만 해도 1만9천여기로, 그 숫자와 밀집도가 세계적이다. 이처럼 전남지역에만  유난히 많은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를테면 특정시기에 국한되어 그 많은 지석묘가 조성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석묘들은 한 시대를 넘어 다음 시기 이를테면 철기시대의 묘제로도 계속 기능하였다고 믿어진다.

더구나 같은 전남지역이지만 고흥반도가 포함된 남해안 일대와 보성강, 섬진강 주변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 유독 많은 지석묘의 밀집현상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지석묘 183개 군, 2천460여기가 밀집되어 장흥군과 함께 전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고흥반도의 경우, 1998년 고흥-벌교 간 도로공사 때 167기의 지석묘 하부시설과 비파형 동검 1점, 마제석검 27점, 마제석촉 49점 등이 출토되어 그곳에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커다란 정치 세력들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해주었다.
 
영산지중해 보다 문화접촉이 늦어

하지만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전남서부 지역에서는 지석묘 대신 철기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주구토광묘와 옹관묘 등이 조영되고 있는데 반해, 남해안과 전남동부 지역에서는 이들 묘제의 흔적이 거의 찾아지지 않은 채 지석묘만 계속 남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 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고흥반도는 금관가야가 있는 김해와 침미다례가 있는 해남반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중국이나 가야, 왜로부터 이입되는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늦었을 것이며, 내륙에 위치한 보성강·섬진강 유역은 산악지대를 관통하며 굽이쳐 흐르는 강의 특성때문에 외부의 문화접촉이 더더욱 더디었을 것이다.

이는 토착적 전통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독자적 성격의 문화가 확립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묘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좁은 분지에서 작은 연맹체들이 분립되어 고립적으로 나타나는 지나친 폐쇄성은 때로는 연맹의 발전을 막았을 개연성도 높다.

이를테면 영산강 유역에서는 세형동검 같은 철기시대의 대표적 부장품은 물론 독자적 청동 제품을 주조하는 청동 거푸집이 영암지역에서 출토되는 등 이 지역문화의 개방성을 설명해주고 있지만, 전남동부 지역과 고흥반도 등 남해안 일대에서는 같은 단계의 동경(銅鏡)은 물론 세형동검과 같은 철기시대의 부장품이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의 발전이 그만큼 더디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농경 발달에 따른 잉여 생산력도 미약하여 ‘연맹왕국’ 이전 단계인 군장사회를 벗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를테면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연맹왕국이 성립되기 시작한 영산강 유역보다 1세기 가량 늦게 성립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군장사회 단계의 주요한 묘제였던 지석묘가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러서도 아직 주된 묘제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지역에 유독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는 현상에 대한 설명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석묘의 밀집분포 지역에 연맹왕국이 성립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보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석묘들이 오랫동안 묘제로 기능하고 있는 까닭을 그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적 폐쇄성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견이라 여긴다. 그것은 지석묘로 사용할 수 있는 재질이 보성강 유역에는 충분한 반면 영산강 유역에는 황토지대로 돌을 구하기 어려운 것과도 관련이 있다. 전남대 부총장이신 허민 교수의 교시처럼 보성강 유역의 지석묘 재질들은 화산석인 응회암 계통으로 화산이 분출되며 쏟아낸 돌들이 많아 지석묘가 일반 백성들의 묘제로 쉽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소국을 통합하고 대국으로 발전

천관우 선생은 일찍이 마한 소국 가운데 13국이 전남지역에 있었다고 하며 구체적인 위치 비정까지 시도를 한 바 있다. 전남지역 지석묘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목포대 이영문 교수도 천관우 선생의 위치 비정이 지석묘의 밀집도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실증한 바 있다. 그렇다면 지석묘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보성 복내, 순천 낙안, 고흥 남양 지역에 비교적 세력이 큰 연맹왕국, 즉 위서에서 말하는 ‘대국(국읍)’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마한 소국 가운데 ‘초리국(楚離國)’이 고흥 남양 일대에 있었다고 천관우 선생은 살폈는데, 근거는 백제 때 남양면을 ‘조조례현(助助禮縣)’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서 착안한 것 같다. 즉, ‘조조례’ 古音 dziwo-dziwo-liei와 ‘초리(楚離)’의 古音 tsiwo-ljie이 음이  비슷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삼국지 위서에 보이는 ‘초리국’명에서 ‘조조례’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봤던 것이다. 고대지명의 어원이 현재 지명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이 간다.

남양면 일대에 ‘초리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과역, 두원, 포두, 정암, 동강, 보성 조성면 등  남양면 주위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지석묘 군(群)에서 확인된다고 이영문 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실제 이 교수가 언급한 이들 지역은 지도에서 확인되듯이, 마치 ‘초리국 내해’처럼 득량만을 빙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어쩌면 그 시대의 득량만은 ‘초리국 지중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들 지역에 백제 때 분차군(分嵯郡)에 속한 비사현(比史縣, 현 동강면), 조조례현(助助禮縣, 현 남양면), 두힐현(豆肹縣, 현 두원면), 동로현(冬老縣, 현 조성면) 등 4개의 현이 있었다는 점도 주목되고 있다. 이를테면 한 군에 속한 현들이 지리적으로 모두 득량만을 둘러싸고 있고, 백제가 특별히 이곳에 4개의 현을 두어 통제를 하려고 한 것은 이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강고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던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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