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적 농경문화와 외래문화가결합되어 독특한 정체성이 확립되다독자적 영산지중해 문화를 성립시키다최근 모 지자체에서 ‘호남의 중심지 OO’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며, 필자가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바이지만, ‘마한의 심장’ 역할을 한 영암이야말로 이를 보다 전면에 내세우며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역사학과 매칭을 시켜 스톨리텔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지난 호에서 분구를 축조할 때 나무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한 양식과 토괴를 이용하여 방사선상 및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성토를 하는 거미줄 형태의 분할성토 방식이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 보인다는 것을 언급한 바
외래문화와 전통문화의 조화필자는 본란을 통해 ‘영산강식 토기’와 마한남부 연맹의 문화적 특질의 관련성을 언급하며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다루며, ‘영산강식 석실’의 원형을 옥야리 방대형 고분(1호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2018년 5월 11일자) 즉, 4세기 중엽에 조성된 옥야리 장동 고분의 석실분이 5세기 중엽에 조성된 나주 다시면 가흥리 고분, 복암리 정촌 고분을 거쳐 ‘아파트형 고분’을 유명한 복암리 3호분의 석실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백제보다는 왜 및 가야 계통과 관련성이 깊다고 살폈었다.이와 같이 최근들어 영산강유역에서 새로운 방식의 고분 축조기술로 만들어진 고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분들은 영산강유역의 마
마한시대 영산강유역 ‘빈장’ 장례2012년 서울 도봉산 자락에 있었던 도봉서원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 금강령과 금강저 등 고려시대 불교용구 79점이 나온데 이어, 2017년 도봉서원 터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 과정에서 지금껏 탁본으로만 전해져오던 ‘도봉산영국사혜거국사비’의 일부가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말하자면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번성했던 영국사가 고려말 어느 시점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터만 남은 그곳에 15세기 초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후원하여 잠깐 부활의 조짐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6중엽 폐사되고, 그곳에 1573년 도봉서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도봉서원의 발굴과정에서 전혀 몰랐던 영국사의 정확한 위치가 드러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중요한 유적지에 그
‘다시들’에 ‘불미국’ 왕국이 있었다최근 경남 함안에서 아라가야 시기의 유적이 출토되고, 공주에서 무령왕릉과 같은 구조인 벽돌무덤이 발견되는 등 은둔의 역사적 사실들이 살포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된 시종 내동리 쌍무덤에서 마한의 심장이었던 고대 영암지역의 실체를 밝힐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 기대해 본다.‘다시들’의 가흥리, 정촌, 복암리 등에 분포한 대규모 고분들의 면모를 통해 큰 정치체가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금송을 묘제에 이용하고, 금동신발을 착용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마한 대국의 하나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영산강을 마주하고 있는 반남과 다시들 지역에 별개의 연맹왕국이 일찍부터 성립되어 있었다. 이들은 규모나 발전의 순위에서 약간의 차
복암리 세력은 풍부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내륙 및 백제, 왜, 가야, 심지어 중국과 중개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워갔다. 정촌 고분의 피장자가 백제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 등 왕릉에 사용된 고급수입 목재인 금송(金松)을 이용하였고, 유려한 곡선의 용머리 장식을 한 금동신발을 신은 채 묻힌 사실은, 이 지역 연맹장임을 분명히 한다. 역시 금동신발이 출토된 복암리 3호분 피장자의 신분 또한 연맹체의 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말하자면 당시 ‘다시들’ 지역에는 이들 두 세력이 병립하여 있을 정도로 커다란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영암 시종, 나주 반남, 다시들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수많은 거대 고분들은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공주, 부여 지역에서는 이러한 대
묘제를 통해 시대적 특성 찾아엊그제 5월 25일, 필자는 금정면 신유토마을에서 ‘마한의 심장, 영암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특강을 할 기회를 얻었다. 본보 연재를 통해 일관되게 주장한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마한 연맹체의 심장부가 현재의 영암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남다른 영암 인사들의 자긍심과 정체성이 고대 마한에서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이날 행사에는 마한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있는 유인학 위원장을 비롯하여 장흥군수, 영암군수 등 영암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과 함께 필자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 삼국시대가 아닌 가야사·마한사까지 포함된 ‘5국 시대’의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쓸 날이 곧 다가오리라 확
얼마 전 경상도 쪽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고등학교 친구가 필자의 글을 읽은 소감을 메일로 보내왔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본다. “오랫동안 잊혀지고, 버려진 역사 그 많은 고분들이 널려 있었지만, 가야와 함께 빛을 보지 못했던 유적과 지역의 역사…근대에 와서는 왜인들이 임나일본부 등의 낭설을 전파시키면서 그 연결고리가 되는 유물이 나와 행여 전라도 해안이나 가야의 역사가 일본의 전진기지임을 증명하는 근거라도 나올까 걱정한 나머지, 한국인들에 의해조차 더욱 무시된 것은 아닌지?…이름하여 5천 년 역사인데, 사라진 고조선 3천 년 역사를 되살려야 하고, 남은 2천 년도 마한, 진한, 변한을 중심으로 복원해야 진정한 한국사가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내용이었다.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복천동
마한사 연구와 지역의 정체성며칠 전 (사)왕인박사현창협회 전석홍 회장께서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필자의 글을 꼬박꼬박 읽는다며 격려를 해주셨다. 또 한 재경 퇴직공무원은 시종지역과 반남지역을 아우르는 정치체가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주는 등 본지를 애독하는 많은 재경향우들에게 필자의 글이 마한사에 대한 관심을 넘어 고향 영암을 생각하는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21세기는 4차산업 혁명시대라고 하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TV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주요 신문들의 인문학 주제와 관련된 기획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한다. 인문학의 중심에 역사학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사실을 엮어 스토리
주지하다시피 영암지역은 내동리 고분군, 옥야리 고분군, 신연리 고분군, 자라봉 고분 등 49건 187기의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을 정도로 고대 영산강유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영암지역은 영산강의 하류에 속하여 이른바 ‘영산지중해’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이 가운데 시종지역은 신연리 고분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39호), 옥야리 고분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40호), 만수리 고분군, 내동리 쌍무덤(전라남도 기념물 83호) 등 다수의 고분군이 인접하고 있어 고대 영산강유역의 핵심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필자가 살핀 바 있지만 이 대형 고분들은 시종과 반남지역이 시종천을 중심으로 ‘내비리국’이라는 불리는 마한의 대국이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해
나주 복암리에 2016년 개관한 ‘복암리 고분 전시관’이 있다. 복암리 고분을 실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이 전시관에서는, 4월 13일부터 ‘남도 마한, 백제와 만나다’라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 한성박물관에 있는 마한계통의 유물을 전시하는 행사이다. 작년 한성박물관에서 있었던 ‘영산강 옹관의 한성 나들이’라는 특별 전시회의 답방인 셈이다. 두 지역의 문화적 특징들이 백제의 영산강 문화인지, 아니면 상호 교류의 흔적인지 논란이 많지만 공통된 특징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 20년(498)에 “탐라가 조공을 내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므로 정벌을 중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역사 고장으로 영암을 부각시켜야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가 완전 시행되면서 각 지자체들은 각 고을의 특징을 브랜드화 하여 관광 상품화함으로써 지역발전의 계기로 삼으려 하였다. 강원도 화천 산천어축제, 순천만 갈대축제, 그리고 우리지역 영암의 왕인문화축제 등 각 지역의 역사, 자연, 문화 등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우리 영암지역은 왕인박사라는 고대 일본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대학자가 태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주목을 받았고, 최근들어 고고학적인 발굴성과에 힘입어 영산강유역의 마한 세력의 중심지였다는 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것을 군정의 브랜드화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가령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경북 고령군의 경우 ‘대가야
지난 주 영암왕인문화축제 일환으로 이루어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영암 구림을 찾았다가 국제고 박창재 교장과 함께 그 지역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과거 왕인박사 일행이 왜로 떠났던 상대포와 마한 연맹체의 핵심세력이 자리하였던 역사적 터전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찬란한 역사적 전통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필자에게 조금 더 쉽게 글을 써달라는 전석홍 왕인박사현창협회 회장님의 당부가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쉬운 글을 쓰려고 하나, 아직 이 지역에 대한 마한사 연구가 일천하다 보니 전문적인 견해들이 자주 소개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며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하고 싶다. 필자는 영암지역의 역사를 가능한 추적하여 그것이 갖는 의미를 밝히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독자적인 연맹체를 결성한 영산강유역 연맹체들이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낙랑, 왜와 교류를 하며 새로운 고유문화 전통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필자는 밝히려 노력하였다. 영산 지중해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신창동 지역에서 보이는 왜계 및 낙랑계 유물들은 영산 지중해 일대가 대외교역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해주었다.이미 일본 열도에 ‘영산강식 토기’라고 명명된 이 지역 특유의 토기를 통해서도 영산강유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음을 살필 수 있었지만, 재지적인 색채가 분명한 신창동식 옹관과 꾸러미 채 발견되는 오수전 화폐는 독자적인 정치체의 존재를 명맥히 해준다. 광주 월계동 지역에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같은 거대한 봉분은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수많은 토기들 독자적 정치체
토착적인 전통, 강고해마한사를 연구하는데 큰 어려움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나 가야·신라의 역사였던 경상도 지역에 비해 발굴·조사가 상대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그 시대의 특성을 살필 수 없다는 점이다. 영산강유역은 1917년 일제가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주일대의 대형고분 일부를 발굴·조사하면서 실체 파악에 접근할 수 있었다. 보성강과 섬진강유역은 주암댐 건설과 순천만 개발과 관련하여 일부 지역에만 발굴이 이뤄져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한계가 있다.낙안지역을 지배했던 ‘불사분사국’의 실체는 벌교지역의 ‘금평 패총’ 유적을 제외하고는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불사분사국’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뿐 더 이상 상세한
묘향산관광일명 태백산(太白山 또는 太佰山) 혹은 향산(香山)이라고도 한다. 묘향(妙香)은 불교용어로 기향(奇香)을 말하는데, 이것은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 나오는 말이다.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계향(戒香)·시향(施香) 3종이 있으며, 이것은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말한다.이 산에는 향목·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묘향산이라 지칭하였다. 태백산에서 ‘백(佰·白)’자의 유래는 광명(光明)·양명(陽明)을 뜻하는 ‘imagefont’자에서 나왔으며, 이 산은 백두산의 장백산맥 줄기가 남으로 낭림산맥으로 내려와 서남쪽으로 달리는 묘향산맥의 주봉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의 신앙적인 대상으로 숭배되었다.『삼국유
옥류관 냉면천덕리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옥류관 식당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북한 주민들이 줄 지어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2층으로 안내 되었다. 북한주민과 우리를 격리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다. 으리으리할 정도로 호화로운 홀로 보인다. 정면에는 금강산 그림이 걸려 있다. 당 고위층의 연회 장소와 외국인 접대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대동강 기슭 옥류바위 위에 세워진 2층 한옥인 옥류관은 지난 1960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식당이다. 평양냉면을 비롯해 평양온면 대동강 숭어국, 송어회 등으로 유명하다.특히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옥류관 냉면은 메밀로 반죽한 면이 남한의 냉면에 비해 부드럽고 육수 맛도 담백한 것이 특징으로, 지난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
앞서 구례 용두리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계 유물들을 가지고 백제와 가야의 교류 관계를 살필 수 있다는 일부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짧게 피력한 바 있다. 이들 지역에서 가야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남동부 일대를 ‘가야문화권’으로 분류하는데 흔쾌히 동의하는 것이 가능할까?전남동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야문화 흔적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의 의문이 생긴다. 말하자면 두 지역이 섬진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교류가 활발하여 서로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정치적인 영향력 확대로까지 지나치게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화개장터’라는 노랫말에도 있듯이
남북이 4월 정상회담 개최를 비롯해 정상 간 핫라인을 설치하는 등 한반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합의가 이뤄져 그 어느 때보다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앞서 열린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사상 첫 올림픽 개회식 남북한 공동 입장과 27년 만에 결성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평화 올림픽’을 상징했고 세계에서 환호를 보냈다. 본지는 이 같은 평화를 향한 여정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과 북한농촌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차원에서 학산면 광암마을 출신 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공동대표의 ‘북한농촌 방문기’를 연재한다. 현 대표는 지난 2007년 3월 한 종교단체의 ‘남북나눔운동’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4세기 후반의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 결과 전남지역의 마한 연맹체가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도 4세기 이후에도 이 지역에 ‘마한’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더더욱 마한 소국의 후예들 사이에 과연 동질감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하지만 적어도 4세기 후반까지도 ‘마한’이라는 연맹체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마한으로 왔다"(강남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영산강과 섬진강을 연결하는 교통로지금도 보성 사람들에게 ‘생어복내’(生於福內)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필자가 어렸을 때는, 복내장이 읍내의 보성장에 버금갈 정도로 규
‘추억의 영암’ 발간 배경은?일제강점기 영암에는 대략 장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1천여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영암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짧게는 1년, 길게는 35년간 살았다. 이들은 종전 후 고국으로 돌아가 1960년대 ‘영암회’를 만들어 교류해오면서 1984년 1월 ‘피와 땀과 눈물의 기록-추억의 영암’(이하 ‘추억의 영암’)을 발간했다.‘추억의 영암’은 한때 영암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한국 고향’에 대한 회상록이다. 즉, 회원들이 영암에 살면서 가졌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긴 자료로 사진 40여 쪽, 본문 800여 쪽, 영암회 명부 76쪽 등으로 구성했다. 책 말미에 수록한 명부에는 1945년 8월 12일까지 영암에 체류한 일본 사람들의 일부 명단 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