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1>득량 지중해의 맹주 ‘초리국(楚離國)’(中)

보성군 조성면의 출토유물과 유적, 고흥군 과역·동강·남양면 일대의 수많은 지석묘군들은 ‘초리국’ 연맹왕국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성면에서 발견된 취락 구조와 고흥 중산리 고분군

작은 단위의 정치체가 많아

남한 지석묘의 70% 이상이 밀집되어 있는 전남지역 지역묘군은 그 분포 형태나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 경남지역의 경우 여러 취락에서 하나의 지석묘 묘역을 공유한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전남의 동부지역과 득량만 일대의 남해안 지역은 개별 촌락마다 별도의 지석묘군을 만든 것으로 믿어진다. 이를테면 경남지역은 여러 촌락을 하나로 아우르는 큰 정치체를 만드는 것이 용이할 수 있는 반면, 전남지역은 독립된 촌락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단위의 정치체의 출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남지역은 이처럼 소규모 정치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연맹장의 세력도 상대적으로 미약했을 법하다. 이와 관련하여 경남지역에는 길이 10m, 폭 4.5m, 높이 3.5m 무게 350톤 정도나 되는 거대한 지석묘가 조성되어 있는 반면, 전남지역은 길이가 10m를 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1∼2m의 작은 규모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거대한 지석묘를 사용한 경남지역 연맹왕국의 정치권력은 변한 12국의 하나인 구야국의 전신을 떠오르게 하지만, 전남지역은 아직 군장(Chief) 사회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소국을 생각하게 한다. 필자가 변한 지역에서는 대·소국 간에 세력 차이가 커서 연맹 간의 통합작업이 활발했으나, 마한지역은 세력 간의 우열이 드러나지 않아 통합력이 미흡해 초기국가로 나아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한 지적이 여기서 확인된 셈이다.

토착성이 강한 지석묘

 

고흥 중산리 고분군

남한의 지석묘 하한이 대체로 기원전 3∼2세기로 추정되는 데 반해, 전남지역의 경우는 철기 시대 후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원삼국 시대까지도 주된 묘제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은 일반 백성들의 묘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전남지역 지석묘군이 조영되는 말기 단계에 이르러서는 부장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는 이동희 교수의 지적은 이와 관련하여 시사적이다. 전남 지역의 지석묘는 토착성을 강하게 띠어 새로운 묘제가 들어와도 그것이 수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남지역 동부에 새로운 묘제가 늦게 들어온 까닭이다.

 여하튼 전남지역의 지석묘 분포 양태나 규모, 그리고 존속기간을 통해 소규모 정치세력들이 독자성을 강고하게 가지고 있어 통합력이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립성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형적 특징, 이를테면 좁은 산악지대를 굽이쳐 흐르는 보성강, 섬진강 유역에는 영산강 유역이나 해남 반도처럼 넓은 평야지대가 없어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도 단절되어 있어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강한 토착성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강한 토착성은 고유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폐쇄적인 측면도 있어 문화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역기능도 있다.

연맹의 중심지, 고흥 과역면 일대

초리국 중심지인 과역면 도천리와 과역리, 남양면 중산리와 동강면 유둔리 등에 수 백여 개의 지석묘가 군(群) 별로 분포되어 있다. 이처럼 밀집된 지석묘군 가운데 과역리 민등 고분군에 있는 길이 540cm, 폭 250cm, 높이 130cm의 크기의 지석묘 단 1기가 규모가 가장 큰 대표적 지석묘이고, 길이 3m가량되는 것이 군별로 2~3기, 대부분은 길이 1m 안팎 정도의 소형 지석묘이다. 지석묘 분포형태를 보면 마치 작은 지석묘들이 중앙에 있는 큰 지석묘를 감싸고 있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규모가 가장 큰 지석묘가 있는 민등 고분군의 지석묘 조영 집단이 득량만 소국 가운데 가장 큰 정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등 고분군이 있는 과역리는 ‘초리’ 명칭과 관계 있는 ‘조조례현’이 있는 남양면과 인접하여 굳이 행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이 초리국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강대한 세력을 가졌기에 인근 소국을 통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각 지석묘군의 중심에 있는 규모 3m 정도의 지석묘를 통해 그곳에 소국 단계의 정치체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초리국의 중심지라고 믿어지는 남양만과 직선거리로 불과 15㎞도 채 떨어지지 않은 보성군 조성면에는 귀산리(4개군 51기)·봉릉리(5개군 41기)·매현리(4개군 49기) 등 23개군 209기, 득량면의 14개군 39기 등 37개군 248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철기와 삼각구연점토대 토기, 이른 철기시대의 묘제인 토광묘, 환호와 밀집된 원형 주거지 등 연맹왕국의 모습을 입증할 수 있는 많은 유적·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장산이라는 비교적 평탄한 야산에 자리잡은 조성리 유적에서는 환호, 밀집한 주거지, 패총, 토광묘 등이 복합적으로 확인되었고, 주거지의 중복도 심하게 나타나 장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이 정주했음을 알려준다. 심지어 불과 540㎡ 넓이에 주거지가 31기나 중복되어 있을 정도로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에 비교적  많은 인구가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를테면 조성면의 지석묘 분포 양태와 발굴유물을 통해 당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연맹체 모습을 확인한 셈이다.

남양만과 득량만 세력이 연합한 대국

한편, 득량만 연안의 연맹체들은, 대국을 지향하였던 영산강유역의 ‘내비리국’처럼 보다 적극적인 통합작업을 추진하였다고 본다. 부산 인제대 이동희 교수가 득량만을 매개로 남양만 세력 즉 초리국과 조성면 세력이 연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살폈지만, 3세기 후반에 이르러 초리국 반경 20km이내에 있던 조성, 동강, 두원 지역에 있었던 연맹체들이 대국이었던 초리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고 믿어진다. 이것은 조성리 유적에 보이던 환호가 3세기 무렵 없어지고 있는데서 확인된다. 

이제 득량만의 맹주가 된 ‘초리국’은 비옥한 농경지와 풍부한 해산물, 낙랑-백제-침미다례-<초리국>-금관가야-왜로 이어지는 중계무역에서 얻은 상업적 이익 등을 통해 마한 연맹체의 또 다른 대국으로 성장하여 갔다고 여겨진다. 조성 지역의 출토 유물과 유적, 과역·동강·남양 일대의 수많은 지석묘군들은 ‘초리국’ 연맹왕국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현재의 득량만 일대의 지형은 일제가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하면서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한 결과물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성 지역에서 고흥 대서면 일대까지 해안을 따라 형성된 길이 10㎞×폭 2㎞에 달하는 넓은 평야의 대부분은 호남정맥에서 발원한 대곡천, 조성천, 득량천, 영천 등 하천들이 비록 유로의 길이가 짧고 수량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바다에 연한 감조 하천의 특성과 해수면의 침강에 따라 수천 년 전부터 형성된 비옥한 옥토였다. 

득량만 일대는 자갈질모래, 점토질모래, 점토 등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이라는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동강면의 유둔리 지석묘군이 있는 곳도 대강천과 원통천 등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보면 이른바 ‘득량 지중해’에 위치하여 있는 여러 연맹왕국의 중심 세력이었던 초리국은 마치 ‘영산 지중해’에 자리 잡아 영산강유역의 대국으로 발전하였던 ‘내비리국’과 비슷한 경제기반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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