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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49개 군(群), 187기의 br옹관묘 집중 분포한 ‘옹관묘의 고장’

외래문화와 전통문화의 조화
필자는 본란을 통해 ‘영산강식 토기’와 마한남부 연맹의 문화적 특질의 관련성을 언급하며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다루며, ‘영산강식 석실’의 원형을 옥야리 방대형 고분(1호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2018년 5월 11일자) 즉, 4세기 중엽에 조성된 옥야리 장동 고분의 석실분이 5세기 중엽에 조성된 나주 다시면 가흥리 고분, 복암리 정촌 고분을 거쳐 ‘아파트형 고분’을 유명한 복암리 3호분의 석실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백제보다는 왜 및 가야 계통과 관련성이 깊다고 살폈었다.
이와 같이 최근들어 영산강유역에서 새로운 방식의 고분 축조기술로 만들어진 고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분들은 영산강유역의 마한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를 던져줄 뿐만 아니라 백제, 가야, 신라, 왜와의 교류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1호분)은, 독특한 구조의 석실과 함께 토괴를 활용하여 정연하게 구획하여 고분을 축조한 지망상의 분할성토 방식, 독특한 특징을 가진 원통형 토기 등을 통해 주변과의 교류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특징들을 단순한 문화교류 차원을 넘어 영산지중해의 거점 지역으로써의 옥야리 지역이 지닌 역사적 위치와 결부시켜 그 의미를 추적해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경주 대릉원을 연상시키다
주지하다시피 영암군에는 49개 군(群), 187기에 달하는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가히 ‘옹관묘의 고장’이라 일컬을 만하다. 특히 삼포천 수계에 속한 내동리·신연리·옥야리를 중심으로 무려 25개群, 100여 기의 옹관묘가 모여 있는 시종면 지역은, 고분의 크기나 숫자를 통해 적어도 4∼5세기에 걸쳐 마한의 대국 수준에 해당하는 정치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이 가운데 상촌 19기, 신산 5기, 서촌 1기, 장동 3기 등 여러 마을에 총 28기가 분포되어 있는 옥야리 지역 고분군을 항공사진으로 보면 마치 경주 대릉원에 온 느낌이다. 이와 같이 밀집된 무수히 많은 대형 고분들은 이곳이 과거 마한 연맹체의 세력 거점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옥야리 고분군과 불과 1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삼포천 하류에 ‘남해포’라 불리는 유명한 포구가 있었다. 이 포구는 1990년이후 그 기능을 다했지만 영산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도 목포에서 이곳을 종점으로 하여 여객선이 다녔고, 둑 건설 후에는 내수면 어업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할 정도로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거란의 침공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을 온 고려 현종 임금이 남해포의 해신을 위해 사당을 설치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 선박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남해당’의 제사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한 사실 등을 살필 때, 이곳이 고려, 조선 훨씬 이전부터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다시들’ 지역의 경제적 번성을 이끌었던 ‘회진포’와 더불어 ‘남해포’ 또한 시종, 반남 지역에 형성된 마한대국의 번영을 일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믿어진다. 특히 영산강하구 입구에 위치한 ‘남해포’는 외래문화 유입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으리라 여겨진다.
20여 년 전 목포대 박물관이 이곳 ‘남해당’ 터를 발굴했을 때 확인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지금도 논밭 여기저기서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영산강과 삼포천을 사이에 두고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도작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다시들 가흥리, 엄청난 벼껍질 압착층이 확인되고 있는 광주 신창동 유적과 더불어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 여러 차례 살핀 바이지만, 옥야리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한 마한의 대국은 배후의 시종천 인근 평야지대에서 형성된 풍부한 농업 생산력에다 거점 항구인 남해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개무역을 통해 영산지중해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당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옥야리 방대형 고분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살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옥야리 고분의 상징, 방대형고분
시종면 옥야리 일대에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대형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가운데 봉분이 거대하여 마을 사람들이 ‘동산’이라고 불렀다는 방대형 고분이 장동마을 뒷산에 있다. 분구 규모가 약 30m로 대형에 속할 뿐 아니라 단독으로 존재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끌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두 차례에 거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분구 중심부에서 석실묘 1기, 분구의 사면을 따라 석곽묘 1기, 옹관묘 4기, 목관묘 1기, 매납유구 1기가 확인됐다. 매장시설 및 주구 내부에서는 철갑편, 철부, 철도자 등의 금속류와 고배, 장경호, 유공광구소호 등의 토기류 등 186점의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고, 주구 내부에서는 분구 정상부에 둘려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형태의 원통형 토기도 다량 출토되어 고대 장송 의례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3년에 다시 세 번째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의 축조양식 기법까지 철저히 파악하려 하였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이제껏 출토유물을 통해 당시를 이해하려 하였던 것과 달리 4∼6세기 한일의 고분축조 기술을 비교함으로써 문화교류 측면 및 이 지역의 역사적 위치까지도 밝힐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창녕 교동, 김해 대성동, 양동리 등 가야지역 고분에서 확인되고, 영산강 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분구를 축조할 때 나무 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한 양식과 역시 가야지역에서 흔한 토괴(흙덩이)를 이용하여 방사선상 및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성토를 하는 지망(蜘網,거미줄) 형태의 분할성토 방식 등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는 확인되고 있다. 가야고분 축조에서 사용된 분할성토 방식은, 방대형 분구의 중심을 기준으로 회색점토를 사용해 세로 방향으로 약 10등분 하고, 가로 방향으로 2∼3개 정도 연결한 후 그 사이를 적색 사질점토와 회색점토를 엇갈려 쌓은 방식을 말하는데, 옥야리 고분처럼 한 변의 길이가 30m, 높이 4m가 넘는 큰 방대형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 거미줄 형태의 분할성토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축조에서 나타난 분구성토 방식은 기존의 영산강유역 분구 성토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가령 일반적으로 영산강유역 고분의 분구 성토는 반남의 신촌리 9호분, 복암리 3호분처럼 분구 외연에 단면 삼각형의 둑을 둘러쌓고 이 내부를 메워 나가는 방식으로 서일본 공법과 유사한 제방형 성토방식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기본적으로 토괴라는 구획재를 사용해 분구평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구분한 후에 성토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야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분할성토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획한 공간에 고분 주변에 도랑(周溝주구)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단단하게 결구하면서 쌓아 올리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선진화된 기술이었다.
그런데 옥야리 고분의 분구축조 시 분할성토 등은 가야 양식을 채용한 것 같으나, 세부적 성토 방식에서는 가야지역과 다른 독자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독자적인 문화로 녹여내고 있는 이 지역 문화의 특성을 알 수 있겠다. 다음 호에 자세히 살펴보겠다.
글=박해현 박사

글-박해현  yasin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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