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8>영산강식 토기를 통해 본 마한남부 연맹(中)

주지하다시피 영암지역은 내동리 고분군, 옥야리 고분군, 신연리 고분군, 자라봉 고분 등 49건 187기의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을 정도로 고대 영산강유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영암지역은 영산강의 하류에 속하여 이른바 ‘영산지중해’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가운데 시종지역은 신연리 고분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39호), 옥야리 고분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40호), 만수리 고분군, 내동리 쌍무덤(전라남도 기념물 83호) 등 다수의 고분군이 인접하고 있어 고대 영산강유역의 핵심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필자가 살핀 바 있지만 이 대형 고분들은 시종과 반남지역이 시종천을 중심으로 ‘내비리국’이라는 불리는 마한의 대국이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영산강식 석실의 원형고분

이 가운데 옥야리 고분군에서 동남쪽으로 800여m 떨어진 남북 방향의 저평 구릉 남쪽 끝 가까운 능선에 길이 30m, 너비 26.3m, 높이 3.3m의 대형 방대형 고분인 장동 1호분이 있다. 2012년 이루어진 조사결과 분구 중심부에서 석실묘 1기, 분구의 사면을 따라 석곽묘 1기, 옹관묘 4기, 목관묘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규모뿐만 아니라 고분의 구조가 이른바 ‘영산강식 석실’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룰 예정으로 있지만, 옹관 일색의 영산강유역의 고분 형태에 석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데 장동 고분이 그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4세기 중엽에 조성된 장동 고분의 석실분이 5세기 중엽에 조성된 나주 다시면 가흥리 고분, 복암리 정촌 고분을 거쳐 ‘아파트형 고분’을 유명한 복암리 3호분의 석실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석실분들은 백제보다는 왜 및 가야 계통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외래문화를 주도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곧 영산강유역이 이러한 문화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영암지역이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모습이 이른바 영산강식 토기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외래문화 주체적으로 수용

5세기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왜계 토기들이 전방후원형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광주 월계동 1호분 전방후원형 고분에서는 수에키 토기 계통의 개배, 고배, 유공광구소호 등의 모방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왜의 하니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통형 분주 토기는 재지화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5세기 후반 무렵의 대규모 도요지가 확인된 나주 오량동 유적의 개배의 회전 깎기 기법이 수에키 토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왜와 활발한 교류를 살필 수 있다.

신라계 토기 계통으로는 개와 장경호 등이 있는데, 모두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주 영동리 3호분 석실묘에서 출토된 신라 계통의 개와 삼족배는 비록 현지에서 제작은 하였다고 하나 소성 흔적으로 보아 신라 지역과 직접 교류를 했던 흔적으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5∼6세기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가야계와 왜계 심지어 신라의 성격이 많이 찾아지고 있으나 백제의 흔적은 뜻밖에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유물에서도 백제계보다는 왜계, 가야계 문화요소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산강유역이 이미 기원 이전부터 낙랑과 가야, 왜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는 것과 연결을 지어보면 이해가 된다. 반면 백제의 흔적이 6세기 이전까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마한남부 연맹과 대치하고 있던 백제가 이 무렵까지 반도 서남부 일대에 거의 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영산강식 토기라고 알려져 있는 토기들이 주로 영산강 본류와 고막천유역 등 지류, 북으로는 고창, 영광지역의 와탄천 유역, 함평천 유역, 해남, 장흥, 심지어 고흥 일대까지 분포하고 있어 이들 지역이 같은 문화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북 완주 상운리 고분이나 전주 장동고분군 등에서도 유공광구소호가 발견되어 전북지역 대부분도 영산강식 토기 문화권에 속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곧 차령산맥 이남까지 마한남부 연맹체였다고 하는 사실을 토기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마한남부 연맹체의 동질성 확인

이 가운데에서도 영산강식 토기의 특징적인 유물들이 주로 영산강유역의 본류, 지류와 더불어 고창, 해남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관심을 끈다. 이를테면 이들 지역이 해남반도 일대의 ‘침미다례’, 영산강 본류에 속한 영암 시종과 반남지역에 위치한 ‘내비리국’, 신창동ㆍ월계동 지역에 위치하여 일찍이 한 군현, 가야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연맹왕국 등 마한 남부 연맹의 핵심을 이루었던 정치체들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에서 마냥 우연의 일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이들 지역에서 출토된 개배와 함께 유공광구소호와 무개고배, 분주토기들은 지역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가령 개배의 경우, 개의 드림부나 배의 구연부 끝이 뾰쪽하게 끝나는 점 등은 영산강 유역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이들 지역이 동일한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는 증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공통된 특징을 보이는 토기들이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개배나 유공광구소호 등이 기종이나 형식이 이처럼 영산강 상류, 중류, 하류 등 지역에 따라 약간 달리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개배의 경우, 개의 상부 중앙이 둥글게 처리된 것, 상부 중앙이 좁게 편평면이 만들어지고 두꺼운 편인 것, 상부 중앙이 넓게 편평하며 신부에 비해 드림부가 높은 것 등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고, 유공광구소호 또한 지역에 따라 저부 형태가 원저, 평저, 말각평저 등으로 구별되고 있다. 곧, 상류=월계동식, 중류=복암리식, 하류=반남식으로 특징을 분류할 수 있다.

연맹적 성격도 드러나

이는 해당 지역에서 같은 영산강식 토기를 각 지역의 실정에 맞게 변형을 가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차이는 그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연맹체들이 성립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이들 지역들이 신창동 유적과 월계동 전방후원형 고분이 있었던 월계동 지역, 복암리 일대, 신촌리 9호분으로 대변되는 대형고분이 있는 반남지역 등 영산강유역에서 비교적 큰 정치체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이를 통해 마한 남부 연맹체를 구성한 대국들의 구체적인 위치도 아울러 특정지을 수 있다. 나아가 영산강 유역의 마한남부 연맹체들이 비록 같은 연맹체를 결성하였지만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연맹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진다.

한편 발형기대나 통형분주 토기의 무늬나 형태에서도 영산강 상류와 하류의 양상이 구분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서현주 교수에 따르면 상류지역은 대체로 문양 등에서 복잡한 모습을 보이거나 영향을 준 외래 토기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하류지역은 재지적인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아울러 영산강 토기 문화권에서는 개배나 유공광구소호의 형식, 분포 범위에서만 지역적 차이가 약간 보이는데, 영산강 하류지역에 위치한 시종천 일대에서는 그 차이가 뚜렷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미약하다고 한다. 이처럼 영산강 하류지역의 토기들에서 보다 재지적인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지역의 정치체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고한 토착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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