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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헌들은 마한남부 연맹체의 실체를 밝혀주고 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5>마한남부 연맹과 백제(中)
나주 복암리 고분군 나주 복암리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들이다. 1995∼1997년까지 조사를 통해 32기의 다양한 무덤이 발견됐다. 옹관묘, 수혈식석실묘, 석관묘, 횡혈식석실묘 등 다양한 형태로 금동제신발, 관모, 고리자루큰칼 등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죽은 사람의 신분이 최고 지배층임을 보여준다. 복암리 고분군은 백제세력이 토착세력인 마한세력을 지배한 결정적 자료로, 4∼7세기 집단무덤 성격과 무덤 변천과정 연구에 중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지난 주 영암왕인문화축제 일환으로 이루어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영암 구림을 찾았다가 국제고 박창재 교장과 함께 그 지역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과거 왕인박사 일행이 왜로 떠났던 상대포와 마한 연맹체의 핵심세력이 자리하였던 역사적 터전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찬란한 역사적 전통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 조금 더 쉽게 글을 써달라는 전석홍 왕인박사현창협회 회장님의 당부가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쉬운 글을 쓰려고 하나, 아직 이 지역에 대한 마한사 연구가 일천하다 보니 전문적인 견해들이 자주 소개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며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하고 싶다. 필자는 영암지역의 역사를 가능한 추적하여 그것이 갖는 의미를 밝히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영산강유역이 근초고왕 이후 백제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새로운 주장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근초고왕 때 지배를 받았던 영산강유역 마한 세력들이 5세기에 들어 백제가 고구려 압박을 받는 틈을 이용하여 반 독립적인 상태에 있었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이나 복암리 고분에서 보이는 백제적인 요소를 위세품으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그것이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의 전남지역 진출설을 비판한 한성 백제박물관 김기섭 박사는 4세기 이후에 ‘마한’이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는지 의문일 뿐더러 마한소국 후예들 사이에 상호 동질감을 과연 가지고 있었는지도 궁금하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4세기 이후에 영산강유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아직도 백제와 이 지역 마한세력과의 관계에 대해 기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 마한 연맹체들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족한데다, 근초고왕의 남정을 보는 시각이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 간의 현상을 보는 관점도 상이한 점이 한 몫 하였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문헌사학과 고고학의 융합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보다 차분히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목지국 밀어내고 주도세력으로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27년 4월에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성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에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라 하여 온조왕 27년(AD9)에 진즉 멸망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마한’ 멸망을 언급한 유일한 기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료에 대한 부정론, 긍정론, 수정론 등 관점에서 따라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일찍이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후대의 위작이라고 불신하는 입장에 있어 이 사료를 신빙하지 않았으나, 그동안의 연구와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통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온조왕 대의 기록 또한 당연히 믿어야 된다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위 기록은 백제가 건국 초부터 한강유역의 농업 생산력과 한(漢) 군현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일찍 영역국가로 발전하였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아무리 백제가 초기에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하더라도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온조왕 당시보다는 3세기 중후반의 고이왕대, 또는 4세기 중후반의 근초고왕대의 일을 잘못 기록했다는 입장도 있다. 일종의 수정설인 셈인데, 3세기 설은 고이왕대의 관제정비 사실을 강역확장과 연계시킨 것이며, 4세기 설은 근초고왕대의 활발한 군사 활동성과를 시조 온조왕에게 투영시켰다는 것이다. 고이왕대의 관제정비도 6세기 성왕대의 관제정비가 고이왕대로 투영되었다는 의견도 상당하지만, 3세기 고이왕 때 마한을 완전 복속하였다고 하는 주장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3세기 말에 30여국 가까운 마한 연맹왕국들이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모습들이 사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때 고이왕대 설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

온조왕 27년의 마한멸망 기록은 이렇듯 많은 논란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온조왕대 기록은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킨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주변 마한연맹체를 차지하며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백제는 한강유역의 비옥한 경제기반과 한 군현과 끊임없는 교류를 통한 선진문물의 획득 및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면서 길러진 강력한 군사력을 토대로 영역확장에 나섰다. 마침내 3세기 후반에 이르면 마한연맹체의 핵심세력이었던 목지국을 밀어내고 마한연맹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때 백제가 주도한 마한연맹의 남방 경계선에 대해 경기도 안성 설, 또는 금강 설로 양분되어 있다. 금강 설은 온조왕 24년에 백제가 웅천에 울타리를 세우니 마한이 반발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웅천은 지금의 공주로 추정되기 때문에 금강 일대까지 영역 확대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기록은 백제의 남방 한계선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고 있다. 반면 안성 설은, 고이왕 때 마한 멸망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으로 아무리 백제 세력이 강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금강 일대에까지 진출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안성천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웅천이 지금의 공주지역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필자를 포함하여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백제 중심의 마한북부 연맹과 마한남부 연맹의 경계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여하튼 백제가 남하하면서 필연적으로 마한 여러 왕국들을 복속했을 것인데, 그 연맹체가 언제 완전히 해체되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남방영역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마한남부 연맹, 유대감 과시

진서(晉書)를 보면 함녕 2년(276)부터 태희 원년(290) 사이에 동이(東夷)가 조공·귀화·내부했다는 기사가 무려 15회나 나와 있다. 같은 책 ‘사이전(四夷傳)’ 마한조와 진한조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기록을 통해 마한연맹체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진(晉)에 조공한 정치세력이 동이 8국(함녕 2년 2월), 동이 17국(함녕 2년 7월), 동이 6국(함녕 4년 3월), 동이 9국(함녕 4년 시세), 동이 20국(태강 원년 7월), 동이 29국(태강 3년)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진서 ‘四夷傳’ 마한조에는 태강 원년(280), 2년, 7년, 8년, 태희 원년(290)에 마한이 특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보면 3세기 말까지 수 없는 마한연맹 왕국들이 역사상에 성립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마한이 고이왕 대에 멸망했다는 주장은 더 이상 논란의 가치가 없다. 

진서 등에 ‘동이’, ‘마한’ 등의 이름이 각각 보이고 있는 것은 이들이 하나의 통합된 국가가 아닌 느슨한 수준의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 조공 기사에  ‘백제’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게 생각되는데, 이는 아직 당시 ‘백제’라는 이름이 국제사회에 두각을 나타낼 수준은 아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3세기 말, 백제는 이미 한 군현과 충돌하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마한왕’, ‘진왕’을 자처하는 목지국을 밀어낼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어 중국에서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로 파견된 진(晉)을 방문한 수십 여 마한 연맹왕국 사신단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 국명이 보이지 않은 것은 필자가 지적한 바 있지만, 당시 진을 방문한 사신들이 침미다례 중심의 마한남부 연맹왕국 사신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때 이들이 중국에 갔던 것은, 목지국 중심의 마한 연맹체가 백제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위기감을 느껴 전개하였던 적극적인 외교책의 일환이었다.

4세기 후반에도 기록 남아

이렇게 보면 마한은 3세기를 넘어 4세기까지도 수많은 왕국으로 구성된 연맹체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들이 어떤 정치적인 변동도 없이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의 1세기 지난 4세기 후반까지도 ‘마한’ 이름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마한으로 왔다"(강남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기록은 사찰의 사적기이기 때문에 사료로서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백제’를 굳이 ‘마한’으로 표기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당시의 사실을 반영해주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를테면 4세기 후반, 즉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원정 이후에도 ‘마한’이라는 연맹체가 영산강유역에서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침미다례’, ‘내비리국’ 등의 대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연맹 왕국은 그들의 결속력을 과시하며 주변국과 교류를 하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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