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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왜 등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성장한 다시들 세력■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41>복암리 마한 연맹왕국과 ‘다시들’ 고분군(中)

묘제를 통해 시대적 특성 찾아

엊그제 5월 25일, 필자는 금정면 신유토마을에서 ‘마한의 심장, 영암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특강을 할 기회를 얻었다. 본보 연재를 통해 일관되게 주장한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마한 연맹체의 심장부가 현재의 영암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남다른 영암 인사들의 자긍심과 정체성이 고대 마한에서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마한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있는 유인학 위원장을 비롯하여 장흥군수, 영암군수 등 영암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과 함께 필자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 삼국시대가 아닌 가야사·마한사까지 포함된 ‘5국 시대’의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쓸 날이 곧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고대사를 전공한 필자로서는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10여년 전, 무안 사창에 있는 고모님 묘역을 정비할 때, 일을 맡은 보성지역 인부들이 고모님 묘소 근처에 집단으로 조성되어 있는 시댁 집안의 방형고분이 아닌 원형봉분을 조성하였다. 먼 훗날 역사가가 방형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 유독 원형이 조영된 봉분을 보며 그 까닭을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원형고분은 이미 마한시대부터 전남지역 전역에 걸쳐 조영되어 있는 반면, 방형은 영산강 유역권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양식이었다. 이렇듯 영산강유역인 무안 사창지역에서 방형의 고분들이 아직도 조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묘제의 전통성을 새삼 알게 된다. 묘제를 통해 시대적 특성을 찾으려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6세기 중엽까지 지속된 옹관묘 조영집단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고분들을 보면 지역 간에 구분이 잘 드러난다. 초기옹관이 출토되는 마제(말굽)형과 초·중기 옹관이 함께 출토되는 제형(사다리꼴)분은 영산강유역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후기옹관이 출토되는 방형분은 복암리와 반남 일대에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복암리와 반남 지역에서 옹관을 초기부터 끝까지 분묘에 사용하였지만, 그 밖의 지역인 영산강 상류와 서남해안, 고막원천과 함평천 상류 등에서는 후기 형식 옹관이 확인되지 않은 채 백제계나 왜계 석실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복암리와 반남지역에 옹관 묘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은 그 지역의 토착성의 강고함을 말해준다. 곧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정치체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복암리 3호분에서 출토된 옹관묘 22기, 수혈식 석곽묘 3기, 횡혈식 석실분 11기, 황구식 석곽묘 1기, 횡구식 석실묘 2기, 석곽옹관묘 1기, 목관묘 1기 등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순으로 변천하는 묘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처럼 한 봉분 안에 여러 묘제들이 집중되어 나타난 것은, 이 지역이 지닌 농업 공동체로서의 강한 유대감으로 인해 추가장에 의한 가족장이 발전하면서, 초기에는 수평적인 확장을 통한 추가장이 이루어지다가 점차 수직적 확장을 통한 추가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동일한 곳에서 수 세기에 걸쳐 대형고분이 조영된 것은 단순히 추가장 또는 가족장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다. 즉, 강력한 재지세력이 오랫동안 토착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복암리 3호분에서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말로 소멸시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던 옹관묘가 6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옹관묘를 사용한 마한세력이 그때까지 존속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말하자면 4세기 후반,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기존의 이해는 더 이상 논쟁할 가치가 없게 되었다.

영산강식 석실분’ 모델 옥야리 고분

복암리 3호분에서 확인된 10여 기가 넘는 석실분의 존재는, 이제 옹관과 함께 석실고분 시대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영산강유역에 횡혈식 석실이 도입되고 변천되는 과정까지도 알게 해주었다.

옹관과 목관 일색이던 영산강유역에 석실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 영산강 하류에 위치한 시종 옥야리 방대형분의 횡구식 석실에서부터였다는 의견이 많다. 영산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나주 가흥리 신흥고분에서 확인된 횡혈계통의 석실분은 이 보다 약간 시기가 늦게 조영되었는데, 옥야리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곧 이어 가흥리 고분과 인접하며 영산강 연안에 위치한 잠애산 비탈에 조영된 복암리 정촌고분이 횡혈식 석실분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 변의 길이가 30m, 높이 7m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인 정촌고분은 모두 3차례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조사에서 전모가 드러난 정촌 1호분 석실은 현실 장축 4.8m, 단축 3.6m, 높이 3m 내외로 현재까지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된 가장 큰 석실인데다, 발등에 용머리 장식이 부착된 화려한 형태의 금동신발도 출토되어 이 지역에 세력이 큰 수장이 존재하였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모두 세 차례 추가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촌 고분에서 두 번째 추가장이 진행될 무렵인 5세기말, 복암리 3호분과 같은 방형분의 석실분이 조영되고 있다. 이 무렵 시종 자라봉 고분, 광주 쌍암동 고분, 복암리 건너 영동리 고분이 축조되었고, 반남지역의 신촌리 9호분은 수직으로 확장되면서 상층에 옹관이 매장되었다. 이처럼 시종 옥야리 고분에서 처음 모습을 보였던 석실분은 가흥리 고분, 정촌 고분, 복암리 고분을 거치며 이 지역의 특질을 지닌 이른바 ‘영산강식 석실분’으로 자리매김해갔다.

백제 계통과 다른 영산강식 석실분

이처럼 석실고분을 조영한 것은 이 지역의 전통인 추가장에 용이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영산강유역 석실분을 백제 석실분의 영향과 관련하여 살피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핀 바처럼 영산강유역 석실고분들이 내륙을 통해 남하하는 것이 아니라 영산강 하류에서 연안을 따라 북상하거나 인근 내륙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어 백제 석실고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 백제식 석실은 산록에 위치하며 궁륭형 천장을 하고 장축 방향이 남북 방향을 띤 반면, 영산강유역 석실은 동서방향을 띠고 있으며, 평천장을 한 정촌 고분처럼 궁륭형 대신 평천정, 맞조임 천정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백제식과 같은 맞조임 천정 형식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벽석을 밖에서 눌러주는 보강석을 별도로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문(玄門)도 할석만을 쌓아 연도를 밀폐하는 개구식(開口式)과 판석으로 입구를 우선 막고 연도에 추가적으로 할석 폐쇄를 하는 문틀식 현문으로 나누는데, 웅진기에는 개구식이, 사비기에는 문틀식이 유행한 백제와는 달리, 영산강유역은 등장 단계에서부터 문틀식과 개구식이 병존하였고, 수적으로 문틀식이 보다 많았다.

개구식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영산강유역에서 보이는 석실들은 백제와 관련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영산강유역에 석실분의 등장을 백제의 영향력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라 하겠다.

활발한 대외교류 독자적 석실고분

전체 길이가 6.8m나 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영산강유역 횡혈식 석실분 가운데 가장 긴 정촌 1호분은 현문의 문비석에서 연도 천장석까지 한 단씩 상승하는 구조로 평천장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일본 구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정촌 고분 석실에서 바닥에 누어있는 문비석이 발견되었는데, 문비석은 일본 구주지역에서 보인다고 한다. 이렇듯 정촌 고분의 석실은 왜와의 관련성이 많다.

한편 정촌 고분의 1호 석실이 축조된 이후 분구를 되파고 안치된 매장품 가운데 나온 개배는 전형적인 복암리식에 해당하지만, 그 이전 축조당시 조성된 층에서는 스에키계와 오량동식 개배가 공존하고 있다. 같은 곳에서 나온 유공광구호도 오량동 출토품은 동체부에 원형 구멍이 뚫려 있는 형태로 구연부가 강조되지 않았으나, 스에키 토기의 영향을 받으며 점차 동체부가 줄어들고 구연부가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정촌 고분에서 나온 목재의 재질을 시료 분석한 결과 ‘금송’이 확인되었는데, 한반도에서는 식생되지 않고 시코쿠 및 큐슈 등 일본남부 지방에서 자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5세기에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영산강유역의 석실분들은 백제와의 관계보다는 왜와의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말하자면 당시 영산강 유역 정치 세력들은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왜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러한 묘제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복암리 3호분에서 왜의 규두대도의 기원이 된 규두대도(圭頭大刀) 및 귀면문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는데, 복암리 세력이 백제와 왜 사이에서 사치품을 유통하는 중개무역을 하며 부를 축적하는 증거라고 보는 의견이 있는데 양 지역의 교류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인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 백제의 2화 입식과는 달리 신라 가야 계통의 3지입식 내외관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이 지역이 백제, 왜, 가야 심지어 신라와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정촌 고분에서는 중국에서 3∼4세기에 제작된 시유도기, 이부호, 청자반구호 등이 출토되어 이 지역과 교류 가능성도 알려준다.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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