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7>영산강식 토기를 통해 본 마한남부 연맹(上)

양직공도의 백제사신 양직공도(梁職貢圖)는 양나라 무제의 일곱째 아들인 소역(蕭繹)이 형주 강릉의 자사로 있을 때 형주에 온 외국사절들의 모습과 풍속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려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당시에 교류한 아시아 국가들을 연구하는데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나주 복암리에 2016년 개관한 ‘복암리 고분 전시관’이 있다. 복암리 고분을 실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이 전시관에서는, 4월 13일부터 ‘남도 마한, 백제와 만나다’라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 한성박물관에 있는 마한계통의 유물을 전시하는 행사이다. 작년 한성박물관에서 있었던 ‘영산강 옹관의 한성 나들이’라는 특별 전시회의 답방인 셈이다. 두 지역의 문화적 특징들이 백제의 영산강 문화인지, 아니면 상호 교류의 흔적인지 논란이 많지만 공통된 특징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 20년(498)에 “탐라가 조공을 내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므로 정벌을 중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마한 지배와 관련된 중요한 기록이지만 이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이 뜨겁다.

백제의 지배와 무관한 정치체

하나는 동성왕이 무진주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으로,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백제 영역설의 근거로 작용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동성왕의 친정 목적이 무진주가 아닌 탐라국을 대상으로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진주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초고왕 때 마한 정복설을 염두에 두고 내린 해석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때 나오는 ‘탐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도무’로 읽어지는 강진지역과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양직공도’에 나오는 ‘하침라’를 말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세기 중엽까지도 강진지역은 백제의 영역이 아닌 방소국으로 남아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498년 이전은 물론 이후까지도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달리 해석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영산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영역화 시기에 대해서 연구자들에 따라 4세기 후반, 5세기 후반∼6세기 초, 6세기 중엽으로 의견이 다르다. 이 문제를 다각도로 천착했던 필자는  기록을 토대로 6세기 이후 백제 영역 편입설의 가설을 세워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수많은 유적 유물들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용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독자적인 정치체의 유물

영산강유역 연맹체들이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낙랑, 왜와 교류를 하며 그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하는 것은, 신창동 지역의 여러 유물들과 일본 열도에 ‘영산강식 토기’라고 명명된 이 지역의 특유의 토기들을 통해 확인하였다. 특히 재지적인 색채가 분명한 신창동식 옹관과 꾸러미 채 발견되는 오수전 화폐 또한 독자적인 정치체의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었다.

고고학적 자료는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 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영산강식 토기’와 같은 문화적 독자성은 지역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 정치적 독립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은 안 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으로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화적 독자성이 위축됨과 동시에 새로이 정복 세력의 문화 요소가 파급되는 현상도 함께 확인되어야 한다는 임영진 교수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하다.
 
영산강식 토기의 출현
 

유공광구소호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유공광구소호는 영산강 지역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토기다. 5세기경 주로 영산강하류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6세기 전반까지 ‘영산강식 토기’라는 이름으로 일본까지 알려졌다.

최근 영산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통해 그 시기의 특징을 찾으려는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이 가운에 묘제와 더불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토기의 특성에 대한 분석 작업이다. 영산강유역 토기의 특징을 연구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서현주 교수에 따르면, 이미 3세기 무렵부터 이중구연호나 광구평저호, 호형분주 토기 등이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고, 심지어 호형분주 토기는 금강이남 지역까지 출토 범위가 넓혀지고 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말한 마한남부 연맹의 세력권과 이들 출토 토기들의 범위가 일치하고 있다. 4세기 후반에 나타난 경질의 양이부호·광구소호·장경소호, 5세기에 나타난 유공광구소호 등도 영산강 지역의 특징적인 토기였다고 한다. 주로 영산강하류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공광구소호는 6세기 전반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토기로 ‘영산강식 토기’라는 이름으로 일본 지역에까지 알려졌다. 

5세기 무렵에 유행한 고배(高杯)도 영산강유역의 경우, 무개(無蓋)식으로 백제의 유개(有蓋) 고배와 형식에 차이가 있다. 완형에 가까운 배신이 가야 또는 왜의 수에키 토기와 비슷한 것으로 볼 때, 고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영암 신연리 9호분 출토품이 장흥 상방촌 유적에서 나타난 가야계 기대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가야 토기의 영향력이 이 지역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6세기를 전후하여 아주 작은 수량이지만 백제식 유개 고배가, 그리고 6세기 이후에 백제의 통형 기대와 유사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점차 나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백제 양식과 다른 호형분주 토기

금강이남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된 호형분주 토기가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영산강 유역권에서 더욱 대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지역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 무렵 일본 고분시대 하니와의 영향을 받은 통형의 분주토기가 차츰 재지적 특징을 보이면서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과 신촌리 9호분 등 여러 대형 고분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원통형과 상부에 나팔부가 있는 호통형이 조합을 이루고 1∼2줄의 돌대가 돌려지며 그 사이에 3∼4개의 투창이 뚫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토기는 백제 지역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어 영산강식 토기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한편 마한 단계의 편구형 원저 단경호에서 점차 구형화되고 있는 타날문 단경호는, 소성할 때 횡치소성이 이루어지는 등 형태나 타날 문양 등에서 아라가야의 승문 타날문 단경호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한성 도읍기 이후 점차 무문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백제 단경호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이 역시 이 지역에 아직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처럼 영산강유역에서 5∼6세기 무렵에 유행한 토기들이 백제 지역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거나 설사 보인다하더라도 형식적인 면에서 구별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백제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유개고배, 전형적인 직구단경호, 통형 기대 등이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에 소량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출토된 토기만을 가지고 살핀다면, 영산강식 토기들이 지닌 독자적 특질은 적어도 6세기 전반 무렵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때까지 영산강유역에 독자적 정치체가 존속되어 있었다는 앞서의 추론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연맹체와 활발한 교류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은 유입된 다양한 외래문화를 폭넓게 수용하여 재지적인 특성으로 용해시켜내고 있었다. 외래계 토기 가운데 가야지역에서 나타났던 광구소호, 약간 늦은 장경소호, 승문 타날문 단경호 등이 서남해안 지역에서 4세기 후반부터 가장 먼저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 전반 무렵에 영암 등 영산강하류 지역으로까지 확대되며 주류를 형성하였다.

특히 5세기부터 나타난 가야계 고배는 전북 고창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었는데,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광주 장수동 점등 고분에서 대가야계의 유개장경호가, 장성 영천리 고분에서 점열문이 시문된 소가야계의 고배, 광주 명화동 고분에서 대가야 계통의 모자 모양의 꼭지 달린 개 등이 출토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특히 대각이 달린 소가야 계통의 대부호는 재지화가 이루어진 흔적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가야와 관련된 자료는 4∼6세기에 걸쳐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등으로 계통을 달리하여 나타났고, 점차 기종이나 형식이 재지화되는 경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영산강유역 마한 연맹체들은 가야 연맹체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외래문화를 고유의 전통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영산강하구에서 점차 내륙방면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도 살필 수 있어 남원 방면에서 영산강 상류쪽으로 유입되었다는 일부 주장과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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