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3>마한동부의 대국 ‘불사분사국’(下)

순천 덕암동 유적지와 출토유물 순천 덕암동 일대의 유적지는 4~5세기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등의 토기가마, 옹관묘, 석곽옹관묘 등의 유적이 발굴돼 당시 마한 연맹체의 취락실태를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웃 ‘불사분사국’의 사회도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토착적인 전통, 강고해

마한사를 연구하는데 큰 어려움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나 가야·신라의 역사였던 경상도 지역에 비해 발굴·조사가 상대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그 시대의 특성을 살필 수 없다는 점이다. 영산강유역은 1917년 일제가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주일대의 대형고분 일부를 발굴·조사하면서 실체 파악에 접근할 수 있었다. 보성강과 섬진강유역은 주암댐 건설과 순천만 개발과 관련하여 일부 지역에만 발굴이 이뤄져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한계가 있다.

낙안지역을 지배했던 ‘불사분사국’의 실체는 벌교지역의 ‘금평 패총’ 유적을 제외하고는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불사분사국’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뿐 더 이상 상세한 것은 파악하기 어렵다.

낙안지역에 자리 잡은 ‘불사분사국’은 인근 보성강 중류의 ‘비리국’이나 득량만을 차지한 ‘초리국’에 버금갈 정도의 세력을 형성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지석묘의 밀집도가 두 지역보다 현저히 작고, 그곳의 유적 크기도 조성리 유적이나 석평 유적보다 훨씬 작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불사분사국’의 연맹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딘 것은 산악에 둘러싸인 마한 동부지역의 특성인 분립적인 성격의 지역성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남쪽으로 열려있다 하더라도 득량만 연안 초리국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 내륙은 산지가 발달하여 교통로 발달도 여의치 않아 외부문화 전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편, 바로 이웃한 순천지역은, 바다와 연해 있고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분지형태를 이루는 등 낙안분지와 비슷한 지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불사분사국’과 비숫한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이들 지역들은 비록 바다로 이어져 있다 하더라도 산악지대로 갈라져 있어 분립적인 성향을 띠면서 각기 독립된 연맹체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3세기 후반 위지 동이전에 ‘불사분사국’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연맹체로 기록에 보이는 것은 ‘불사분사국’이 이곳 연맹체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반경 10㎞를 넘지 않는 좁은 곳간에 갇혀 있는 분지형태를 띠고 있어 설사 ‘국읍’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영산강유역이나 득량만유역의 연맹체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규모였을 법하다.

물론 남쪽이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하더라도 순천 분지에서는 딱히 패총과 같은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낙안지역의 경우는 금평 패총처럼 소규모여서 해양 활동이 적극적이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내륙분지의 농업이 주산업이었지만, 영산강유역처럼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부의 축적도 미약하여 자급자족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계층의 분화가 덜 이루어졌을 것이라 여겨진다.

목곽묘 단계의 사회

 

순천분지 일대는 최근 신도시 건설과 관련하여 발굴·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져 4∼5세기 당시의 모습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순천 덕암동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원삼국시대 환호·구상유구, 원삼국시대~삼국시대 주거지 238기, 삼국시대 토기가마, 옹관묘, 석곽옹관묘, 석곽묘 등 복합사회를 알 수 있는 유적이 발굴되어 순천분지에 있는 마한 연맹체의 취락실태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이웃 ‘불사분사국’ 사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전남동부 일대는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고분과 같은 독자적인 고분 및 ‘영산강식 토기’와 같은 ‘독자적’인 토기문화도 발달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확인된 4∼5세기 고분은, 5세기 후반까지도 전통적인 목곽묘가 낮은 수준의 군집을 이루며 조영되다 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 비로소 석관묘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등 목곽묘 단계에서 오랫동안 사회가 정체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외부문화 유입은 늦어

반면 영산강유역에서는 4세기까지 조영되던 목곽묘가 4세기 후반 옹관묘와 공존하는 등 변화가 나타났었고, 경남서부 지역에서도 높은 군집도로 조영되던 것이 5세기 전반에 석관묘와 공존하다 5세기 후반에 고총 고분이 등장하면서 주변 묘제로 격하되거나 완전 소멸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다른 지역보다 새로운 묘제 유입이 매우 늦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전남동부 지역은 외래문화 유입이 더디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높은 산지가 둘러싸고 있는 폐쇄적인 지형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남쪽으로 바다가 열려 있긴 하지만  리아스식 해안 특성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복잡한 해안선 때문이 아니라 초리국으로 대표되는 인근 득량만 연맹세력이 해상무역을 장악한 상황에서 낙안과 순천분지의 연맹소국들이 대외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재지적인 성격 비중 커

한편, 전남동부 지역에서 재지계인 장란형 토기와 호(壺) 중심의 고배(高杯) 등 가야계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특히 가야계 토기의 출현은 가야문화의 영향력 확대와 관련하여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사실, 전남동부 지역은 마한 연맹체의 세력 중심인 영산강유역보다 경남서부 지역이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가야지역과 접촉이 빈번하였으리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폐쇄적인 지형적인 조건은 두 지역의 교류가 예상보다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출토 토기들을 분류해 보면, 심발형 토기나 장란형 토기와 같은 재지적 성격이 강한 토기의 비중이 대표적인 가야계 토기인 고배, 호보다 많이 차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남동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다양한 호 가운데, 서부 경남지역에서 광범하게 분포하고 있는 수평구연호 토기 등은 거의 출토되고 있지 않다는 의견은 주목된다.

게다가 이곳에서 발견된 가야계 토기라 하더라도 가야계 토기를 모방한 재지적인 성격의 것들도 많다. 결국 4∼5세기에 전남동부 지역에 보이는 가야토기는 당시 가야와 교류를 통해 반입했거나 그 과정에서 획득된 정보를 갖고 생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전남동부 지역에 보이는 일부 가야토기를 가지고 가야문화권의 확대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 생각한다.

결국 전남동부 지역은 비록 더디었지만 각 지역별로 형성된 독자적 문화를 간직하며 발전을 하였다고 보고 싶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는 토착문화를 토대로 영산강과 득량만 유역의 마한 문화, 가야계 문화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때 동부지역에서 주로 이용된 원형 집자리의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영산강유역에서 유행한 방형 주거유적도 함께 보이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이들 지역이 외부 문화와의 교섭을 통해 발전한 점이지대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이들 지역에서는 철겸(鐵鉗), 철부(鐵斧) 등과 같은 철제품이 거의 출토되지 않고, 위신재도 단순 부장품에 불과하는 등 영산강유역 고분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빈약하다. 말하자면, 이들 지역은 집단 간, 집단 내의 계층성이 아직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4∼5세기까지도 이들 지역에는 일정한 체계를 갖춘 정치체의 힘이 미약하여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본다.

영산강유역에서는 3세기 후반 대형 분구묘의 출현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전남동부 지역은 4세기에 들어서도 목곽묘가 지속되는 등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에 3세기 후반에 침미다례나 내비리국과 같이 강한 대국이 출현하고 있었지만 전남동부 지역은 아직 뚜렷한 연맹체를 결성하지 못한 채 작은 소국 중심의 사회가 지속되고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불사분사국’ 또한 이러한 사회 발전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낙안지역이 백제시기에 4개의 속현을 거느린 분차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면 낙안벌을 차지하였던 ‘불사분사국’이 점차 다른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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