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4>마한남부 연맹과 백제(上)

옹관묘, 영산강식 토기, 신창동식 옹관, 삼각점토대 토기 등 지역의 토착성을 반영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독자적인 정치체가 성립돼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독자적인 연맹체를 결성한 영산강유역 연맹체들이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낙랑, 왜와 교류를 하며 새로운 고유문화 전통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필자는 밝히려 노력하였다. 영산 지중해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신창동 지역에서 보이는 왜계 및 낙랑계 유물들은 영산 지중해 일대가 대외교역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이미 일본 열도에 ‘영산강식 토기’라고 명명된 이 지역 특유의 토기를 통해서도 영산강유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음을 살필 수 있었지만, 재지적인 색채가 분명한 신창동식 옹관과 꾸러미 채 발견되는 오수전 화폐는 독자적인 정치체의 존재를 명맥히 해준다. 광주 월계동 지역에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같은 거대한 봉분은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토기들 독자적 정치체 확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학계의 연구자를 포함한 상당수 사람들은 영산강유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예컨대, 영산강식 토기 및 옹관묘와 같은 재지적 요소가 많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인 특징일 뿐 정치적 독립성과는 별개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영산강유역에 유난히 집중 분포되어 있는 옹관묘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6세기에 들어 백제식 석실묘로 대체되고 있는데서 정치세력 변동이 묘제의 변화와 관련이 있어 보임은 분명하다. 옹관묘, 영산강식 토기, 신창동식 옹관, 삼각점토대 토기 등 이 지역의 토착성을 반영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이곳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성립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문 등 여타의 기록에 4세기 중반이후 영산강유역에 기반을 둔 ‘국(國)’의 명칭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근초고왕의 친정으로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 광개토왕릉 비문에는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나라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말하자면 당시 고구려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남부 연맹국가들이 비문에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광개토왕릉 비문에 국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마한남부 연맹국가들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

목재 농기구가 사회발전 이끌어

한편 신창동 지역을 비롯하여 영산강유역에서 철제 농기구 등이 많이 출토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회분화가 촉진되지 않아 정치적 발전이 그만큼 늦었다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 백제의 지배가 본격화된 5세기 이후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며 비로소 사회분화가 촉진되었고, 신흥 부농층의 성장으로 기득권의 위협을 느낀 재지세력들이 백제 중앙권력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충적토로 이루어진 영산강유역은 황토지대이기 때문에 굳이 철제 농기구가 필요하지 않아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늦었을 따름이라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목재 농기구를 가지고도 철제 농기구에 버금가는 생산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무려 두께 155cm에 달하는 신창동 유적의 벼 압착층의 존재를 통해 헤아릴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철제가 아닌 목재 낫을 비롯하여 수많은 목재 농기구들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 해준다. 따라서 생산력을 독점한 지배세력의 권력기반은 점차 강대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말하자면 월계동 전방후원형 고분, 신촌리 9호분 등과 같은 대형고분은 이들 권력자의 힘을 웅변해주고 있다. 곧, 철제 농기구가 사회분화를 촉진하여 기득권의 위협을 느낀 세력이 백제 중앙권력과 결탁했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이 지역 출토유물들에서 낙랑계 및 왜계 요소 그리고 재지적 요소들이 함께 보이는 것은 재지적인 토착성을 바탕으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를 용해시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지역 마한 연맹체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영산강유역 연맹체들이 강고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백제와의 관계에서 확인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 3월조에 “왜가 사마숙이를 탁순국에 파견하였는데, 탁순국왕이 말하기를 ‘갑자년 7월 중에 백제인 구씨 등 3인이 와서 동방에 귀국 일본이 있다고 들었는데 통하게 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백제가 탁순국을 매개로 왜와 통교하였다는 것이다. 탁순국은 현재 경남 창원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근초고왕 21년(366)의 일이다. 말하자면 이때 비로소 백제와 왜가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백제는 섬진강 물길을 통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백제는 어떻게 왜와 통교하였을까 궁금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는 낙랑에서 왜로 가려면 한반도 서남해안을 경유하여 가야 및 대마도를 거치는 해로를 이용한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백제가 왜와 통교하려면 이 루트를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4세기 중엽에 창원지역의 탁순국을 통해 왜와 통교를 시도했다면 이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백제가 섬진강 줄기를 타고 서부 경남지역 연맹체와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왜 잘 알려져 있는 해상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어 내려오는 경로를 찾으려 했을까?

이는 그동안 한반도 서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침미다례나 내비리국 등 마한남부 연맹을 통해 간접적인 교류를 하였던 백제가 근초고왕 때 와서 왜와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러나 4세기 중엽 백제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마한남부 연맹은 백제와 왜의 직접 교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백제는 서남해안 해상루트를 포기하고 내륙 소백산맥 줄기를 넘어 섬진강을 통해 서부 경남지역으로 우회하는 루트를 찾았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에서 당시 침미다례 등 영산강유역의 정치체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고하였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추론은 불과 3년 후 근초고왕이 왜와 탁순국의 도움을 받아 침미다례를 정면이 아닌 배후에서 공격하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 군대는 그로부터 10여년 후 고구려와 싸울 때 동원된 병사가 3만에 이를 정도로 막강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침미다례 중심의 연맹체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백제가 침미다례를 ‘도륙’ 내었다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엄청난 공격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이 지역에 재지 토착적인 문화요소들이 그대로 보이고 있고, 백제의 대외 무역루트가 여전히 섬진강 줄기를 통해 서부경남 해안이었다는 점은 마한남부 연맹세력이 백제의 침공 앞에 붕괴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는 이 지역이 갖고 있는 강고한 정체성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주장은 더 이상 입론의 근거가 없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