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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반남 지역과 다시들 지역에 별개의 왕국이 있었다

‘다시들’에 ‘불미국’ 왕국이 있었다

최근 경남 함안에서 아라가야 시기의 유적이 출토되고, 공주에서 무령왕릉과 같은 구조인 벽돌무덤이 발견되는 등 은둔의 역사적 사실들이 살포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된 시종 내동리 쌍무덤에서 마한의 심장이었던 고대 영암지역의 실체를 밝힐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 기대해 본다.

‘다시들’의 가흥리, 정촌, 복암리 등에 분포한 대규모 고분들의 면모를 통해 큰 정치체가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금송을 묘제에 이용하고, 금동신발을 착용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마한 대국의 하나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영산강을 마주하고 있는 반남과 다시들 지역에 별개의 연맹왕국이 일찍부터 성립되어 있었다. 이들은 규모나 발전의 순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상호 경쟁하면서 마한남부 연맹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반남지역에는 백제의 거센 파고에 맞서다 6세기 중엽 역사에서 사라진 ‘내비리국’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촌리 9호분으로 대표되는 대형고분 및 출토 금동관이 그 사정을 말해준다. 내비리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그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3세기 말 이전에 성립되어 수 세기 동안 영산지중해의 핵심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다시들 지역에 성립되어 있는 연맹왕국도, 내비리국처럼, 위지 동이전에 대국의 이름을 남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이 지역 연맹체의 실체를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선학들이 위지 동이전에 있는 일부 마한왕국들을 나주지역과 연결시키기도 하였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하고 있다. 이병도는 나주 일원을 ‘불미국’으로 본 반면, 천관우는 ‘신운신국’ 또는 ‘임소반국’ 등이 나주와 광산 일대에 있었다고 하였으며, 이도학은 ‘내비리국’이 반남 일대에 있었다고 살폈다. 이들 모두 명칭과 위치에 있어 이견은 있지만 나주 지역에 하나의 연맹왕국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해 반남, 복암리, 나주시 등 세 곳에 중핵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살핀 연구자도 있지만, 이들 지역의 고분 분포 등을 통해 볼 때, 최소한 시종을 아우른 반남지역과 함평 일부가 포함된 복암리 지역 두 곳에 각각 연맹체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영암 시종·나주 반남 일대에 내비리국이 있었고, 복암리 일대에도 이와 별도의 연맹체가 성립되어 그 이름을 위지 동이전에 필시 남겼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 이 왕국의 실체를 밝힐 단서가 나타났다.

복암리에 ‘두힐사’ 명문이 새겨진 토기 출토

2006년부터 3년 동안 이루어진 복암리 고분군 동편 일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2008년 7월, AD 61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간(木簡)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3년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목간이 처음 출토된 이래 대부분 출토 목간들이 사비시대 수도인 부여 지역이었던 것에 비해, 지방인 복암리에서 처음으로 목간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학계는 물론 당시 언론의 관심이 대단하였었다. 뒤에 출토된 충남 금산 백령산성 목간은 단 1점에 불과하였지만, 복암리에서는 ‘경오’라는 간지, 행정구역 명칭, 관직 명칭 등을 알 수 있는 목간 등 무려 13점이 나왔던 것이다.

목간이 출토된 곳은 복암리 고분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져 있고, 복암리 고분군
의 피장자들이 생활했던 주거 유적인 랑동 유적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정촌 고분에서 북서쪽으로 약 450m 떨어진 곳에 있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유적과 영산강 사이에는 넓은 다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목간은 직경 6.92m, 깊이 5.37m의 대형 수혈에서 출토되었다.

대개 출토 목간이 폐기물인 까닭에 목간의 출토지가 제작지 또는 사용처와 연결되지 않은 것과 달리 복암리 유적은, 유적에서 당시 최고급 기술인 철을 다루는 제철 유구와 ‘관내용(官內用)’ 및 ‘두힐사(豆肹舍)’라는 글자가 음각된 토기, 목간에 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갈았던 벼루 등이 함께 발견되어 목간의 제작-사용-폐기가 한 곳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진 일대가 옛 ‘두힐’ 현 지역이었다

이들 목간들은, ‘경오’라는 간지와 탄소 측정을 통해 610년경에 작성된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이들 명문과 목각에서 나온 문자들을 종합해 보면, ‘두힐’이라는 관청에서 문서 작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필자는 토기 파편에 ‘두힐사’라고 음각된 글자에 주목하여 보았다. 여기서 나온 ‘두힐’ 명문은, 이곳이 과거 백제의 ‘두힐현’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회진’이라고 적힌 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이 지역이 과거 회진지역이었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백제 ‘두힐’현이 통일신라 경덕왕 때 ‘회진’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을 통해, 이들 유물들이 이 지역의 역사적 기록을 입증해주고 있는 셈이라 하겠다. 

백제를 멸하고 웅진, 마한, 동명 등 다섯 도독부를 두었던 당은, 옛 백제지역에 7개 주 51현을 설치하여 지배하려 하였다. 그 가운데 다섯 주가 차령이남 지역에 집중되고 있어, 당이 이 지역 통치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과거 마한남부 연맹을 결성하여 백제와 대립적인 상태에 있었던 차령 이남의 정치 세력들이, 백제가 멸망하자 독립적인 성향을 띠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 것과 무관하지 않으나, 재론할 기회를 갖고자 한다.

전남지역에는 영산강 일대의 ‘대방주’와 보성강 일대의 ‘분차주’가 있었다. 분차주의 중심은 현재 보성강 유역인 보성 복내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대방주는, 지류현·군나현·도산현·반나현·죽군현·포현현 등 여섯 현들을 관할하고 있었다.
 
두힐 지역이 ‘대방주’의 치소였다

삼국사기에 “대방주는 본래 ‘죽군성(竹軍城)’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방주 중심지가 ‘죽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城)은 백제의 부-군-성으로 이어지는 행정구역의 최하 단위를 일컫는다. 죽군성은 곧 죽군현과 같다고 생각된다. “죽군현은 본래 두힐현이다”라는 세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죽군현 이전 명칭이 ‘두힐’이었음은 분명하다. 두힐현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현재 고흥 두원 지역으로 비정하였지만, 분차군에 있는 동일 지명 ‘두힐’과 혼동한 것이라 생각된다.
복암리에서 ‘두힐’ 음각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두힐’현이었음이 옳다.

당이 이곳에 대방주의 치소를 둔 까닭은, 영산강 중류 지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 그 터가 남아 있지만, 7세기 무렵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회진성은 둘레가 무려 2.4km로 서울 몽촌토성보다 규모가 크다. 이처럼 웅장한 토성을 통해, 영산 지중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거점 항구 기능을 하였던 마한 시기 회진항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두힐지역은 영산강 중류지역 중심지

한편, 당시 출토 목간을 보면, 두힐지역 관청이 강 건너 반남과 이웃 함평읍에 해당하는 ‘군나’까지 관할하고 있어 대방주 관할 영역과 비슷하다. 곧, 목간이 작성된 7세기 초에 복암리 세력이 영산강 중류지역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복암리 세력이 성장하는 데 영산강유역 세력을 제어하려는 백제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는 적지 않은 의견들이 있으나 필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별도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복암리 세력이 비옥한 다시들 충적평야의 농업 생산력과 회진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광주 신창동 등 내륙지역 및 가야, 왜, 백제와의 중개무역 등을 통해 축적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반면, 반남지역은 새로운 석실분의 수용을 거부하며 전용 옹관고분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지 못한 것이 발전의 한계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런데 ‘다시들’ 대국을 형성한 복암리 세력을 백제가 두힐‘현’, 죽군‘성’이라 하여 ‘군’보다 격이 낮은 ‘현’ 또는 ‘성’으로 삼았던 것은 마한 연맹체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강력한 힘은 백제의 끊임없는 견제 하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채 유지되어 당 간섭기에 (대방)주 치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발라’와 ‘불미국’ 서로 音이 연결돼 

한편, 대방주 관할 하에 있는 포현현(布賢縣)이 “본래 ‘파로미(巴老彌)였다”라는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이 눈길을 끈다. 파로미의 ‘파로’는 ‘발라’와 음이 비슷하므로, 백제 때 발라군이 있었던 현재의 나주시 일원이 ‘파로미’ 현이 있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병도는 ‘파로미’를 위지 동이전에 있는 ‘불미국(不彌國)’과 연결지어 반남지역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바 있지만, 그곳에는 내비리국이 위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불미국의 위치에 대해 천관우는 전북 부안 또는 정읍 일대로 비정하였지만, 오히려 ‘파로미’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볼 때, 혹시 대방주와 같은 관할을 이루었던 지역인 ‘다시들’에 있는 옛 마한 연맹왕국 명칭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영산강을 마주보며 ‘내비리국’과 ‘불미국’ 두 마한 연맹체가 양립되어 있는 셈이다.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일찍이 성립된 ‘불미국’은 영산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무역을 통해 성장을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흩어져 있는 기록들과 많은 유적, 유물들이 말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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