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영산지중해의 정체성 상징, br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下)

토착적 농경문화와 외래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정체성이 확립되다

독자적 영산지중해 문화를 성립시키다
최근 모 지자체에서 ‘호남의 중심지 OO’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며, 필자가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바이지만, ‘마한의 심장’ 역할을 한 영암이야말로 이를 보다 전면에 내세우며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역사학과 매칭을 시켜 스톨리텔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호에서 분구를 축조할 때 나무기둥을 세워 석실 벽을 축조한 양식과 토괴를 이용하여 방사선상 및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성토를 하는 거미줄 형태의 분할성토 방식이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 보인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토괴를 고분에 활용하는 방식은 풍부한 강수량과 잦은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남부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토괴를 방사상, 또는 동심원상으로 구획하여 성토를 하며 고분을 축조하는 방식은 발전된 토괴활용 방식이라 하겠다.
이러한 방식이 백제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주로 영산강유역에 해당하는 나주 가흥리 신흥 고분, 나주 장동리 고분과 가야지역의 창녕 교동 고분, 신라지역의 대구 달성 성하리 고분 등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데, 주로 방사상 모양으로 구획을 한 후에 성토를 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고분들에서는 동심원 모양으로 구획을 하여 성토를 하고 있어 한반도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토괴 축조시기를 보면 영산강유역에서는 4∼5세기 중엽, 가야지역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6세기 중엽∼후엽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영산강유역에서 이러한 토괴 축조기술이 먼저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토괴구획을 만든 옥야리 집단
그런데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에서는 방사상 구획선과 동심원상 구획선이 결합된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옥야리 고분은 한반도와 왜의 두 지역의 특성이 함께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두 요소를 접목시켜 새로운 고분축조 문화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옥야리 고분에서 나타난 새로운 토괴 축조양식이 영산강유역에서는 5세기 중엽, 가야지역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6세기 중엽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토괴 축조방법을 통해, 남해포라는 국제 무역항을 둔 시종지역이 가야, 왜와의 교류 중심지로 기능하며 고유한 문화적 특질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옥야리 고분에서는 기존 영산강유역의 다른 고분들에서 사용한 일반 성토재 대신 점성이 강한 재료를 분구축조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봉분의 구축 묘광 형태와 경사진 묘도부(墓道部) 등 봉분구조를 보면, 영산강 유역보다는 오히려 창녕 교동 3호분과 대구 성하리 고분 등 가야나 신라 양식과 비슷하다. 또한 대부분 영산강유역 고분들에서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목관묘, 옹관묘, 석축묘 등 다양한 묘제들이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는데 반해,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복암리 인근 가흥리 신흥 고분만은, 분구 중앙에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가 단독으로 축조되고 주변부에 옹관묘가 매장되는 양식을 보여주는 등 특이함이 있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신흥 고분과 다른 면도 있다. 옥야리 고분에서는 목곽이 없는 구조였지만, 신흥리 고분은 목곽이 시설되어 있는 등 차이가 있다.
여하튼 봉분내부 구조만 놓고 보면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전통적인 영산강식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영산지중해 입구의 시종지역은, 남해포라는 국제 무역항을 중심으로 백제-서남해안-가야-왜를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거점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다양한 문화들이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옥야리 방대형분 출토유물 가운데, 영산강토기의 전형을 형성한 유공광구소호도 왜의 스에키 계통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통형 고배는 아라가야가 위치한 함안지역 고배와 관련이 깊고, 장경호와 세승문 단경호 또한 가야 계통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고분축조 양식이 왜, 가야 양식과 비슷한 측면이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전통을 기반으로 외부문화 수용
그러나 출토유물 가운데, 구연을 막은 단경호를 관외 부장하는 전통은, 영산강유역 옹관묘의 대표적인 특징에 속하고, 영산강식 토기의 전형인 조족문이 시문된 단경호와 횡치소성된 단경호도 부장품으로 함께 나온 것을 보면 토착성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역시 출토 원통형 토기 또한 왜의 하니와와 형태상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부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 영산강유역을 대표하는 호형 원통형 토기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고, 제작기법도 토착세력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의견을 고려할 때 재지적인 특징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나아가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 왜, 가야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영산강유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석실분이지만 석실을 받아들인 후에도 옹관묘와 목관묘 등 전통묘제가 같이 병행되고 있는 것도 토착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가야나 왜 등 외부문화의 물적 증거들이 옥야리 고분에서 많이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토착적인 문화요소들이 외부문화에 의하여 대체되지 않은 채 더욱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시종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산강유역의 토착문화가 외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켜가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영산강유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분구와 함께 조성된 횡구식 석실묘가 벽석을 쌓는 방식이 조잡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영산강유역에서 거대 분구의 매장 주체부로 석실이 처음 도입되는 단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하겠다. 말하자면 가야나 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특성을 지닌 거대 분구를 자체적으로 조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특한 정체성이 확립되다
이와 같이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같이 거대 고분을 조영한 시종 지역의 정치 세력들은, 고유문화를 토대로 외래문화를 새롭게 녹여 영산지중해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드러난 문화요소를 확립하는 역량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영산지중해의 국제 무역항인 남해포를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화요소가 시종천 중심의 토착 농경문화와 결합하면서 이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현상을 5세기에 들어 고대 영산강유역의 중심지가 시종지역에서 반남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자, 475년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는 대외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시종지역 세력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일부의 의견이 있는데,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논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
시종천을 경계로 작은 연맹을 각기 형성하였던 시종과 반남지역의 정치체들은 3세기 후반 시종세력이 반남지역으로 통합되면서 ‘내비리국’이라는 마한남부 연맹의 대국이 성립되었다고 살핀 바 있다. 다만, 그 통합이 중앙집권 단계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내부에서 정치 세력들의 독자적 힘을 인정하는 느슨한 단계에 불과했기 때문에 같은 내비리국 연맹이라 할지라도 영산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시종의 옥야리 방대형고분 피장자는 옹관묘 대신 석실분이라는 새로운 묘제를 바로 수용하지만, 내륙의 반남지역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는 토착적인 대형 옹관묘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살피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글=박해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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