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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적 전통에 외래문화가 보태져 강한 정체성이 형성되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1>보성강 유역의 마한대국, 비리국(下)

4세기 후반의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 결과 전남지역의 마한 연맹체가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도 4세기 이후에도 이 지역에 ‘마한’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더더욱 마한 소국의 후예들 사이에 과연 동질감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4세기 후반까지도 ‘마한’이라는 연맹체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마한으로 왔다"(강남 담양 법운산 옥천사 사적)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겠다.

영산강과 섬진강을 연결하는 교통로

보성 석평 유적에서 출토된 수정 원석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영주(纓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석평 유적의 수정공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연맹체 내부에서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아래 사진은 비리국 연맹체 현황도.

지금도 보성 사람들에게 ‘생어복내’(生於福內)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필자가 어렸을 때는, 복내장이 읍내의 보성장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그 옛날 마한시대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풍요로운 경제기반을 자랑한 복내 지역에서 탄생된 비리국 연맹왕국은, 내륙으로는 영산강 상류인 지석천, 하류로는 섬진강 유역과도 통하는 곳에 위치해 있어 인근의 다른 어느 연맹체보다 일찍 빠른 성장을 경험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한때 비리국에 결코 뒤지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율어천 연맹체들은 내륙 분지에 갇혀 있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3세기 후반 인근 비리국으로 통합되어갔다고 믿어진다. 반면 미력 화방리·석평 지역의 연맹왕국은 백제 때 복홀군의 치소가 되고, ‘향’까지 있는 것을 보면 백제에 합병되는 순간까지도 독자적인 세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비리국은 화방리 지역 대국과는 느슨한 연맹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여하튼 비리국 중심의 연맹왕국이 보성강 중·상류 지역을 차지하는 대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사회 발전 상대적으로 적어
 

그런데 석평 유적에서 철기류와 관련된 출토유물이 수정을 가공하는 공방에서 사용된 철촉, 철도자, 철부 등이 약간 보일 뿐, 철제 무기류나 철제 농기구 등은 일체 보이지 않고 있어 철기 사용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만큼 사회의 발전이 더디었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철제 농기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지역 토양이 굳이 철제 농기구가 필요 없는 비옥한 충적토 지대였기 때문일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철기 사용 여부만을 가지고 사회 발전단계를 논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게다가 그곳에서 어망추와 같은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어업의 비중도 적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보성강이 중요한 생업기반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기반이 갖추어져 있는 보성강유역은, 영산강유역보다 훨씬 더 철기 제작과 분배를 통한 사회발전이 나타날 여지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립성과 토착성의 형성

석평 유적에서 50㎡가 넘는 주거지가 나타나는 등 주거지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집단 내의 위계화가 점차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영주(纓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석평 유적의 수정 공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연맹체 내부에서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이 곳 지석묘군에서 거대 지석묘가 눈에 띠지 않고, 대형 주거지도 읍락 안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비록 수장이 있다고 하나 민간에 잡거하여 통제력이 약하고 성곽도 없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처럼 연맹장의 힘이 연맹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강대하였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보성강 곳곳에 형성된 소국들이 분립성과 토착적 전통을 가졌다는 것은 지석묘군이 읍락별로 무리지어 있고, 묘제로 오랫동안 기능하고 있는 데서 짐작된다. 이처럼 소규모 정치체가 지속되면 통합을 저해하여 연맹왕국의 발전을 더디게 한다. 석평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별도의 공방이 있는 등 독립된 생활체가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통합작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립성과 토착적 전통은 정치적 통합을 지향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때로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을 법하다.

다른 지역과 활발한 교류

원형과 방형의 주거지가 공존하고 있는 석평유적에서 처음에 형성된 원형 주거지가 차츰 방형 형태로 바꾸어지고, 원형보다 방형의 비중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원형은 주로 경남지역을 비롯하여 전남 동부지역의 주거지 형태인 반면, 방형은 서부 영산강유역 형태로 알려져 있다.

보성강유역은 고흥반도와 더불어 방형 형태가 일찍 나타났을 뿐 아니라 비율도 높다. 보성강이 시작되는 노동 거석리 구주지역에서 방형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지만,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난 주구토광묘가 장흥 탐진강을 거쳐 보성강 상류를 통해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방형 주거지와 같은 서부 영산강 문화가 탐진강 상류를 거쳐, 보성강 유역으로 유입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보성강 유역이 방형을 새로운 주거지로 받아들인 것은 큰 주거지를 만드는데 원형보다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석평·송림 유적 등 보성강 유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성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타날문 토기가 해남 군곡리 유적, 보성 금평 유적과 조성리 유적, 순천 낙수리 유적 출토 토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송림 유적은 석평 유적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같은 성질의 토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룡산이 가로 막고 있는 득량 지중해 연안에 있는 조성리와 금평 유적, 심지어 군곡리 유적에서 나왔던 토기가 보성강 유역에서도 나왔다는 것은 마한 남부 연맹체 내부에서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보성강 유역의 원형 주거지에서는 전남 동부지역은 물론 영산강유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은 공열 토기가 나오고 있고, 장방형 주거지에서 타날문 토기 등이 출토되는 등 독특한 특징이 보이고 있다. 또한 방형계 주거형태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영산강유역에서 유행된 4주식 주거형태가 보성강유역에서 상대적으로 희소하게 나타난 것은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보성강유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현상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오랜 분립성을 강고하게 가졌던 보성강유역 연맹체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성강은 외부문화의 주요통로
그런데 보성강유역 연맹체들은 전남 동부지역 문화는 물론 서부 영산강 문화도 적극 받아들이고 있고, 심지어 석평 유적과 송림 유적의 가야식 고배에서 알 수 있듯이 소가야와도 교류를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보성강유역이 전남 동부와 서부 두 지역의 점이 지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보성강유역 연맹체들이 산악지대에 가로막혀 폐쇄적인 성격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성강을 통해 외래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토착적 전통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성강유역 문화의 특질이 형성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는 고유 양식보다는 가야, 백제, 영산강, 왜 등 외래요소가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문화 점이 지대의 성격이 강했던 득량 지중해 연맹왕국과 비교된다.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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