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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암 일본인들의 회상록 ‘추억의 영암’
일제강점기 영암에 체류한 일본인 대략 1천여 명 달해
40여년 지나 일본에서 ‘영암회’ 결성 회원간 친목도모
재영암 일본인들 어린시절 추억들 모아 책으로 발간해
패전으로 고통 받고 비참한 귀환기 등 다양한 내용도
1913년 3월 영암소학교 전교생(창립전 임시교사)

‘추억의 영암’ 발간 배경은?

일제강점기 영암에는 대략 장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1천여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영암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짧게는 1년, 길게는 35년간 살았다. 이들은 종전 후 고국으로 돌아가 1960년대 ‘영암회’를 만들어 교류해오면서 1984년 1월 ‘피와 땀과 눈물의 기록-추억의 영암’(이하 ‘추억의 영암’)을 발간했다.

영암신사-본전

‘추억의 영암’은 한때 영암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한국 고향’에 대한 회상록이다. 즉, 회원들이 영암에 살면서 가졌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긴 자료로 사진 40여 쪽, 본문 800여 쪽, 영암회 명부 76쪽 등으로 구성했다. 책 말미에 수록한 명부에는 1945년 8월 12일까지 영암에 체류한 일본 사람들의 일부 명단 및 회원주소가 도도부현별로 작성돼 있고, 한국 동창생 명단, 영암소학교에 재임한 교사 등의 일람표, 학교조합 관리자, 기숙사 사감 등의 기록이 담겨 있다.

발간 당시 ‘영암회’ 회장 오니키 에이스케 씨는 서문에서 “어느 덧 세월이 흘러 패전과 귀환으로부터 내년에 벌써 4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영암이 생각납니다.(중략) 평상시에는 잊고 살아가는 영암이지만,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배우고 놀았던 어린 시절을 상기한다”고 회고했다.

또 이 책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편저자 미야케 히로오(아츠오) 씨는 “타지에서 패전과 귀환! 그것은 국내에서의 패전 체험과는 매우 이질적이며, 개벽이래 미증유의 체험은 앞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그런 만큼 뒤를 잇는 여러분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빌면서 우리의 체험을 조금이라도 기록으로 남겨서 영원히 전한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지금에서야 허심탄회하게 지난 가해자 의식을 진심으로 적나라하게 사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민족 모두 참회와 반성을 같이 하면서 진정한 평화 행복과 공존의 내일을 위해서 본지 추억의 한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회원 여러분과 함께 진심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발간사 취지를 밝혔다.

이번 ‘추억의 영암’ 번역본을 발간한 임희성 영암군하정웅미술관장은 “비록 일제강점기 영암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회상록이지만 이 자료를 통해 과거 영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근대로 가는 길목에 발이 묶인 당시의 영암 사회상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원시사료이다”고 밝혔다.

1909년 11월 영암소학교 임시교사와 운동회에 나선 학생들

영암소학교 탄생 회고록

본문에는 제1부 ‘영암회’와 관련된 내용과 영암소학교에 대한 각종 기록 및 월출산의 추억, 왕인박사 이야기 등이 수록돼 있다.

영암소학교에 다녔던 미야케 히로오(三宅博男) 씨는 “영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부모님을 따라 살았던 곳입니다. 일본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내 고향은 영암(금정면)이다’라는 심정으로 늙어가는 지금도 마음의 어딘가에…생각이 젖어 듭니다.”고 영암소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영암소학교 초대 모가미 교장의 자제를 우연히 만나 입수한 교장의 이력서를 통해 모교의 개교일과 정확한 교명,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전후의 학교교육 관계의 관할, 발령관청, 발령문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 마쓰다 사나에 씨는 모교창립에 대해 저의 아버지와 다른 여러분들이 “소학교 없이는 일본인 자녀의 의무교육은 곤란하다”는 말을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학생수가 10명도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내지에서 일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유모까지 학생 수로 넣어서 어떻게든 형식에 맞춰서 겨우 허가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고 적고 있다. 이어 “저희들이 재학 중일 때는 계속 의무교육이었음에도 학비(수업료)를 냈습니다만 그 후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셨나요?”라면서 영암소학교 시절의 어려웠던 학업과정을 설명했다.

영암소학교에 대한 요시타게 다케오 씨의 기록에 의하면 “창립 전은 서당식으로 군수부인(나카지마 쿠니오미의 어머니)이 자택(공원아래 관사)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아동은 6,7명 정도였다”고 했다. 이어 “신교사를 건설한 고지대는 원래 열 몇 채의 조선인들의 주택지였습니다만, 순차적인 철거에 따라 당시의 자제들이 한마음으로 삽, 괭이 등으로 개척했습니다(중략) 운동장 확장공사 등 모든 것을 선생님과 학생 힘만으로 작업을 했으며, 인부 한 명도 쓰지 않고 열심히 했던 추억입니다. 모가미 선생님의 공적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고 기술, 현재 영암초등학교의 초창기 창립 과정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1961년 3월 벳푸온천에서 영암인회 첫 모임을 갖고 회원들이 기념촬영했다.

패전 그리고 귀환

“(중략)8월 15일, 일본인은 단번에 ‘패전국민’이라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이로부터 미증유의 고난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패전’ 경험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자신과 가족이 어떻게 될지, 공장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8월 19일, 소련군이 원산에 상륙했다. 흥남 지역에의 소련군 침입이 눈앞에 닥쳤다.

패전의 심정이 몸에 사무치게 된 것은 8월 26일경부터였다. 모든 권력기관에서 탈락·추방, 공장으로부터 배척, 체포·구속·고문의 속출, 건국청년대원의 구둣발 침입과 행패, 소련병사의 약탈·폭행 등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태에 이르러서부터였다. 그 때까지의 10일간은 그저 막연한 공기가 감돌뿐, 처참한 세상은 꿈에서도 몰랐다.(중략)” 일본 질소 흥남공장에 근무했던 다카미 소지 씨가 갑자기 처참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도모이케 미쓰요 씨는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살아 있는 목숨까지 앗아가는 전쟁이 이 세계에서 근절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후손을 위해서도 진정한 평화를 진심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원하는 한 사람이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몰려오는 흰옷 입은 무리, 손에는 낯설고 작은 깃발을 치켜들고 만세! 만세! 하는 드높은 외침이 갑자기 온 읍내에 넘쳐나는 것이었습니다. 일장기와 비슷한 태극기, 어느 새에 만들었을까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국기에 무심코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한 사람도 일본어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은 모두 문을 닫았고, 요직에 있던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완전히 무정부상태였습니다.(중략) 생각해보면, 우리 일본인은 너무 우쭐댄 것이 아닐까요? 극심한 독선에 빠져 있던 것이 아닐까요?(중략) 지금까지 억압 받았던 민족이 지니고 있는 원한의 강렬함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암신문  yasin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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