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6>마한남부 연맹과 백제(下)

정읍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해발 132m의 성황산에 자리하며, 성황산과 그 서쪽에 위치한 해발 126m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포곡식산성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 신라에 의해 초축되었거나 아니면 고려시대 현종대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백제의 오방(五方) 중에서 중방성(中方城)으로 확인됐다.

역사 고장으로 영암을 부각시켜야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가 완전 시행되면서 각 지자체들은 각 고을의 특징을 브랜드화 하여 관광 상품화함으로써 지역발전의 계기로 삼으려 하였다. 강원도 화천 산천어축제, 순천만 갈대축제, 그리고 우리지역 영암의 왕인문화축제 등 각 지역의 역사, 자연, 문화 등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우리 영암지역은 왕인박사라는 고대 일본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대학자가 태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주목을 받았고, 최근들어 고고학적인 발굴성과에 힘입어 영산강유역의 마한 세력의 중심지였다는 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것을 군정의 브랜드화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가령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경북 고령군의 경우 ‘대가야 도읍지, 고령’,‘대가야 고령’ 이렇게 홈페이지를 정비하여 ‘고령’ 하면 ‘대가야’를 떠올리게 하였다. 반면, 우리 영암의 경우 최근 ‘기(氣)의 고장’을 부각하고 있지만 국외자의 입장에서 쉽게 다가서지 않는다. 영암을 사랑하는 한 역사학도의 단견이라고 치부하면 좋겠다.

유대의식이 강했던 마한남부 연맹

중국에 조공하기 위해 함께 다녔던 것처럼 마한 연맹체들은 정치적 유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남 지역에서 마한 제국과 관련된 성곽들이 거의 찾아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마한 제국들이 성곽을 갖추어야 할 정도로 상호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외세의 압력도 마한남부 연맹체는 이겨내고 있었다.

한편 마한남부 연맹체가 5세기에 들어서도 독립된 정치체를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자, 일부에서는 백제가 이들 지역을 자치적 성격을 유지시키며 공납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다고 하였다. 마한남부 연맹이 외세에 복속됨 없이 독자적인 발전을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이다. 백제와 마한남부 연맹을 공납적 지배관계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최근 서울 풍납토성의 한 우물에서 5세기 무렵의 토기들이 대거 출토되면서 부터였다. 영산강 지역을 포함한 여러 곳의 토기들이 이 우물에서 한꺼번에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왕실 제사에 봉헌된 공납물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영진 교수가 정치세력 사이의 특산물 공납은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세 성격의 공납과 다른 것이라고 이미 지적하였지만, 필자 역시 백제와 마한남부 연맹체가 대등한 위치에서 제의를 공유하며 교류를 하고 있었던 증좌로 보고 싶다.

근초고왕이 마한 맹주 ‘침미다례’를 공격하였던 루트에 대해 논란이 많다. “백제가 남가라, 탁순 등 7국을 평정한 후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강진)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 주었다”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조 기록에 따라 남해안 쪽에서 공격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초고왕 때 전남지역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던 노중국 교수는 가야를 평정한 백제장군 목라근지가 육로를 통해 강진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근초고왕 또한 한성에서 출발하여 용인-안성-천안-공주-익산-김제-정읍-장성-나주-영암지역을 거쳐 강진으로 이동하는 등 두 갈래의 공격이 행해졌다고 살폈다. 당시 ‘백제왕이 백제국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고 한 벽지산이 현재의 김제 지역이고, 백제의 압박에 놀라 항복한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이 현재의 보성, 나주, 부안, 고부 등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때 차령이남 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근초고왕 군대에 굴복했다?

그런데 과연 당시 전남북 지역에 강력하게 세력을 형성하였던 마한남부 연맹세력이 그저 근초고왕 군대의 위세에 놀라 일시에 항복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항복한 정치체들의 위치를 보성, 나주, 부안, 고부지역으로 비정한다면 백제군이 전남지역 전체를 순간에 온통 휘젓고 다닌 셈이 되는데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항복 지역을 부안, 보안, 김제, 정읍, 고부 등 노령산맥 서쪽지역으로 국한한 천관우 선생의 비정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근초고왕의 직접적인 공격에 항복한 지역은 노령산맥 서부 일대에 불과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가능한 추측이다.

근초고왕 때 전북은 물론 전남지역까지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내세우는 또 다른 근거로 김제 포교리에 있는 ‘벽골제’ 축조 사실을 들고 있다. 벽골제는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시대 3대 저수지의 하나라고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흘해왕 때 축조되었고 둘레가 무려 1800보였다고 한다. 이때가 AD330 년경으로 아직 신라 세력이 이곳에 진출하기 이전 시기이다. 따라서 이처럼 규모가 큰 저수지를 축조할 세력이라면 마한의 수준 가지고는 불가능하고 당연히 백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즉, 비류왕 때 이미 백제 세력이 전북지역에 도달하였고, 이후 근초고왕 때 전남지역까지 확장되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김제 벽골제 축조 양식

그러나 인근 완주 신포 유적에서는 200기 이상의 마한의 분구묘가 출토되고 있어 대규모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마한남부 정치체들이 이 정도 규모의 제방을 쌓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1800보라는 기록은 후대에 저수지가 증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기록이 최초 축조사실로 혼선이 빚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벽골제 축조와 관련된 기록이 처음 축조하였다고 기록된 흘해왕, 그리고 전주 등 7개 고을 주민들이 징발되어 증축했다고 한 원성왕 때 등 모두 신라와 관련있을 뿐 백제와 관련성을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이를 1976년, 2012년 등 두 차례에 걸쳐 벽골제의 수문 일부 등을 발굴 조사하였지만 4세기 축조 당시를 알 수 있는 백제유물이 전혀 찾아지지 않은 것과 관련지어 보면, 벽골제의 축조는 백제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결국 벽골제를 처음 축조한 집단은 백제가 아닌 그 지역의 마한 연맹왕국이었던 벽비리국일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적어도 4세기 전반까지 벽골제가 위치한 김제 일대에는 백제의 영향력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설명이 되겠다.

현재 학계에서는 목지국을 포함하여 마한을 본격적으로 병합하던 4세기 무렵의 백제의 남방 한계선에 대해 차령산맥 이북의 서울, 경기, 충청 지역으로 보는 입장과 전북지역을 포함하여 노령산맥 이북으로 보는 입장이 갈라져 있지만, 전자의 시각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웅진 천도후 백제 남방 국경선

전북지역이 백제에게 복속되었던 것은 노령산맥 서쪽 정치체들이 근초고왕에게 항복할 때였을까? 그런데 정읍 고사부리성과 전주 배매산성 등 백제 성곽으로 확인된 산성들의 축조시기가 웅진시대 이후로 보는 임영진 교수의 견해는 많은 시사를 준다. 말하자면 같은 백제 영역 내에 위치하여 있었다면 굳이 별도의 성곽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교수의 의견대로 이들 지역이 웅진 천도기에 새롭게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면, 그 이전까지는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근초고왕 때 노령산맥 이북지역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주장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근초고왕 때 일시적으로 복속된 지역도 노령산맥 서쪽 일대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령산맥 이북의 마한 연맹체들도 5세기에 들어서며 백제가 고구려의 압력으로 휘청거리는 틈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다 웅진 천도 후에 백제의 남방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전북 일대가 백제에게 편입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남에 있었던 마한남부 연맹과 긴장관계가 첨예화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마한남부 연맹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에 백제 성곽들이 축조된 배경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5세기말까지 노령산맥 이남에 백제와 대립하였던 정치체들이 있었음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양직공도의 독자적 정치체 모습

이와 같이 노령산맥 이남의 독자적인 정치체 모습은 신촌리 9호분과 전방 후원형 고분처럼 영산강유역의 수많은 거대 고분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앞서 자세히 살핀 바 있지만,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의 ‘백제방소국(百濟傍小國)’에 열거된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止迷),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은 주목되어도 좋다. ‘방소국’이라는 국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 지역이 백제의 영역 밖에 있는 또 다른 국가임에 분명하다. 전라도 지역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을 통해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정치체들이 5세기를 넘어 6세기 전반까지도 존속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진다.

특히 ‘지미(止米)’의 명칭이 ‘침미다례’와 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침미다례가 6세기 전반까지도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침미’와 ‘지미’를 그저 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부담스럽긴 하지만, 침미다례 왕국이 백제와 맞서며 남부연맹의 주도세력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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