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오량동 유적

복암리 세력은 풍부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내륙 및 백제, 왜, 가야, 심지어 중국과 중개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워갔다. 정촌 고분의 피장자가 백제 무령왕릉과 익산 쌍릉 등 왕릉에 사용된 고급수입 목재인 금송(金松)을 이용하였고, 유려한 곡선의 용머리 장식을 한 금동신발을 신은 채 묻힌 사실은, 이 지역 연맹장임을 분명히 한다. 역시 금동신발이 출토된 복암리 3호분 피장자의 신분 또한 연맹체의 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말하자면 당시 ‘다시들’ 지역에는 이들 두 세력이 병립하여 있을 정도로 커다란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영암 시종, 나주 반남, 다시들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수많은 거대 고분들은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공주, 부여 지역에서는 이러한 대형 고분들이 쉽게 찾아지지 않고 있어, 4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통설이 사실과 다름을 확인시켜 준다.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이 연맹체를 구성하며 고유의 정체성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옹관묘 및 영산강식 토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강한 토착적 전통 고집한 반남 옹관문화

영산강유역에서 옹관묘 가운데 가장 발달한 U자형 전용 옹관은 최근 발굴조사된 나주 오량동 요지에서 거의 유일하게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그곳에서 생산된 옹관이 인근지역의 옹관 수요를 독점했다는 것이다. 곧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U자 옹관을 생산하고 관리하였던 세력이 지역의 핵심세력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촌리 9호분이 있는 나주 반남지역이 주목되었다. 거대한 봉분에 금동관까지 출토된 신촌리 9호분은 다른 옹관 고분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고, 오량동 도요지와도 10km이내에 있어 옹관고분을 조영한 집단의 중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반남지역은 인근 영산강유역의 여러 지역에서 5세기에 들어 석실묘 등 새로운 묘제를 도입하는 등 변화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6세기 중엽 백제식 석실로 대체될 때까지 다른 묘제를 차용하지 않은 채 옹관묘제만 조영되고 있었다. 물론 왜, 가야 계통의 금동관 양식 및 왜계 분주 토기 등의 흔적에서 이 지역이 외래문화 수용에도 소극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지역보다 강한 토착성을 견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화를 기반으로 마한남부 연맹의 대국 ‘내비리국’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훗날 백제에의 복속을 끝까지 거부하다 ‘절단 낸다’는 의미의 ‘半’이 들어가 백제 때 ‘반내부리현’이 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석실분을 수용한 영산강유역 정치세력

복암리 3호분 가운데 6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실분에서 옹관고분이 함께 확인되어 이 지역이 그때까지도 옹관고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들 지역은 옹관고분 밀집 지역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옹관고분 사회 전 시기를 대표하는 중심세력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옹관의 경우도 성행기가 아닌 쇠퇴기 옹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미약한 옹관묘제의 전통은 기존 옹관묘와 더불어 새로이 유입된 석실분이 유입되어 독자적 묘제로 발전하는 여건을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바야흐로 시종 옥야리 장동 고분에서 시작된 석실분이 나주 가흥리 고분을 거쳐 복암리에 와서 영산강식 석실의 전형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영산강식 석실분이 해남반도 연안, 영산강 중·하류 연안, 함평-광주노선 등 영산강 하구에서부터 영산강 본류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반면, 반남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 삼포강 일대에는 거의 출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5세기 중엽에 이르러 기존 옹관묘 중심의 반남지역 연맹체인 내비리국에 맞서는 새로운 집단이 다시들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영산강을 마주보며 양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반남지역에서 복암리지역으로 영산강유역의 주도권이 넘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시기에 금동관이 출토된 거대한 신촌리 9호분이 조영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신촌리 세력은 여전히 강고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라 여겨진다.

영산지중해 정치체 영산강식 석실문화 완성

한편, 정촌고분과 복암리 3호분에 보이는 금동신발과 석실분을 백제의 위세품 내지는 백제 계통으로 해석하여 복암리 세력이 성장하는 과정에 백제의 역할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복암리 석실은 적어도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계통이 아닌 영산강식 석실분의 특질이 강하게 있었다. 또한 신촌리 9호분 금동관처럼 지역의 금동신발 또한 백제의 위세품이 아니라 현지 재지세력들이 제작한 것이라 여겨진다.

설사 백제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라면, 정촌고분처럼 일본에서 금송을 수입하여 백제 왕릉보다 묘역을 웅장하게 조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두 곳 금동신발 제작시기를 한성시기 말기로 파악하고 있는데, 당시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백제가 지역을 정치적으로 복속하려 시도했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 어렵다. 결국 백제가 반남과 복암리 세력들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은 명백하다 하겠다.

다시들 지역은 영산강이 곡류하여 이루어진 비옥한 충적평야의 높은 농업 생산력과 정촌 세력의 거점인 회진포구를 통해 이루어진 활발한 대외교역 등이 밑거름이 되어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이곳과 인접한 광주 명화동 지역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을 비롯하여 영산강 상류에 해당하는 신창동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고조선 시대의 유물들은 바로 회진 포구를 경유하여 이루어졌던 당시 교역실태를 보여준다.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 일대에 위치한 내비리국 등의 연맹체가 전통적인 농업에 의존한 것과 비교된다.

한편, 다시들 일대의 가흥리, 영동리, 복암리 고분들이 모두 옹관고분을 같은 시기에 조영하고 있어 이들 지역이 동일한 옹관고분 세력권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옹관의 분포가 복암리 지역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미루어 고분군이 처음에는 평지에 가까운 구릉 사면에 조영되다가 평지의 다시들 유적이 위치한 복암리 쪽으로 확장되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모습은 횡구식 석실분이 가흥리 고분에서 정촌고분을 거쳐 복암리 3호분 고분으로 확산되어 가고, 정촌 고분에서 추가장이 이루어질 때 복암리 3호분 고분에서 영산강식 석실분이 축조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정촌과 복암리에서 대국으로 성장한 정치체

이렇게 보면 두 집단이 세력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정촌 세력이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영산지중해의 대표적 포구인 회진포구에 위치하여 새로운 문물 유입과 중개무역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정촌세력이 연맹의 주도권을 앞서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복암리 3호분과 지근거리에 있는 정촌고분이 입지, 축조기법, 석실의 세부구조, 내부매장 시설로 목관을 사용하는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많은 것은 바로 정촌세력이 새로운 문물을 앞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촌고분에 추가장이 도입될 무렵 형성되기 시작한 복암리 3호분의 묘제 및 부장품들을 통해 다시들 연맹체 세력내부의 주도권이 바꾸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부장품 규모만 놓고 보더라도 복암리 일대가 정촌 고분보다 훨씬 많고 장식마구와 은화관식 등 정촌고분에는 보이지 않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서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곧 비록 포구에 위치하여 외부문물을 빨리 유입하였지만 잠애산 경사면에 위치하였던 정촌세력 보다는 다시들 평지에 위치하여 보다 발달한 농업 생산력을 확보하며 정촌세력을 통해 외부 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복암리 세력이 발전의 동력을 확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다시들 지역에는 정촌, 복암리 등 다른 지역의 대국 수준에 해당하는 정치체들이 하나의 연맹체를 형성하여 강력한 정치체로 성장을 거듭하였다.

영산강하구 일대까지 세력을 팽창시켜

복암리 3호분과 같은 영산강식 석실분의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석실분 형식이 신안 안좌도 읍동 고분군과 신안 상태도 상서 고분군 등 영산강하구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고분들 형식이 석실의 종단면형이나 벽면의 석재구성 등에서 부여 능산리식 석실과 차이가 엄연히 있다는 점에서 백제와의 관련성보다는 복암리 세력의 영향력이 그곳까지 미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전북대 김낙중 교수의 의견처럼 이제 다시들 세력이 영산강 중·하류연안을 아우르는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신안 압해도와 장산도를 나주 관할에 두고 있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 하겠다. 훗날 당(唐)이 설치한 7주의 하나인 대방주의 치소(治所)가 복암리 지역에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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