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9>영산강식 토기를 통해 본 마한남부 연맹(下)

마한사 연구와 지역의 정체성

며칠 전 (사)왕인박사현창협회 전석홍 회장께서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필자의 글을 꼬박꼬박 읽는다며 격려를 해주셨다. 또 한 재경 퇴직공무원은 시종지역과 반남지역을 아우르는 정치체가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주는 등 본지를 애독하는 많은 재경향우들에게 필자의 글이 마한사에 대한 관심을 넘어 고향 영암을 생각하는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21세기는 4차산업 혁명시대라고 하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TV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주요 신문들의 인문학 주제와 관련된 기획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한다. 인문학의 중심에 역사학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사실을 엮어 스토리를 만들어가는데 있어 4차산업의 핵심인 인문학적 상상력과 종합적 사고력을 기르는데 중요하다. 또한 역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오늘의 나, 즉 자아를 찾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자살률 세계1위니 하는 안타까운 뉴스가 계속 나오는 것도 바로 자기 삶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즉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영암출신 향우들이 자기의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어느 지역보다 왕성하게 갖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능동성과 주체성 지닌 영암지역 문화

지난 호에 영산강 하류지역에 위치한 시종천 일대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같은 영산강 유역의 다른 지역보다 재지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보인다고 하였다. 이 지역의 이러한 유별난 재지적인 특징은, 별도로 자세히 살필 계획으로 있지만, 시종면 옥야리 방대형 고분(1호분) 석실묘의 구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분구를 조성하면서 만든 수혈계 횡구석실이 분구의 중앙에 단독으로 위치하며 이후에 분구의 주변부에 옹관묘를 매장하는 모습은 3∼7세기에 이르기까지 목관묘·옹관묘·석축묘 등 다양한 묘제들이 지속적으로 축조한 나주 복암리나 영동리 고분들과는 달랐고, 특히 시신을 묘도를 통하여 안치한 후에 천정석을 덮었고 목주를 활용하여 벽석을 쌓는 수법 또한 다른 영산강 유역과는 달랐다. 오히려 가야, 왜 등 주변 지역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석실 내부에서 출토된 유공광구소호, 통형고배 등 외부문화 요소들은 이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석실의 세부 특징은 목주의 위치나 형태, 벽석 구축방식 등은 가야, 왜 등 주변 지역과도 차이가 보일 뿐 아니라 분구 가장 자리에 영산강유역의 토착적 묘제인 옹관묘도 추가적으로 조성되고 있는 것도 이 지역 묘제의 중요한 특성이다. 이를 통해 영암지역 정치체들이 외부문화를 직접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특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그들은 외부문화의 수용 과정에서 능동성과 함께 주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비리국 중심으로 형성된 정체성

이와 같이 시종지역이 지닌 고유의 특성은 시종천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영산 지중해 대국 ‘내비리국’이 강고한 세력을 오랫동안 유지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토착적 전통을 바탕으로 강한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음에 분명하다. 백제적인 특성이 깃들어 있는 토기인 개배가 영산강 상류에 비해 하류 지역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점도 이들 지역이 마한남부 연맹의 거점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다. 훗날 이 지역을 복속한 백제가 이 왕국을 ‘절단 낸다’는 의미의 ‘반나부리’라는 명칭과 ‘군’이 아닌 ‘현’으로 강등시키고 있는 것도 백제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이 지역의 강한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같은 영산강유역 내부에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토기양식이 이동하거나 확산되는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지역의 특징적인 유물들이 단계적으로 변화하거나 통일성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강력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산강 상류, 중류, 하류 등에서 각 지역적인 특성이 드러난 토기 양상만 놓고 볼 때, 여러 정치체가 병존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일부 지역에 국한되거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것만을 가지고 6세기를 전후한 시기 영산강유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오랫동안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산강유역 정치체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 반남지역에서 출토되었던 금동관이나 관모, 금동신발, 장식대도 등이 영산강 상류지역이나 해남반도 등 주변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곧 6세기를 전후하여 이 지역에 나타난 백제계 양식이 일정한 경향성과 통일성이 보이는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렵 백제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나주 다시 정촌고분과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정촌고분에서 확인되고 있는 일본산 금송(金松) 등의 존재는 강력한 정치체가 영산강 곳곳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영산강유역의 독자적인 정치체의 존재를 토기의 특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공존을 선택한 마한 남부 연맹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나 가야에 비해 이 지역 토기들이 연속성이나 통일성 등 일정한 재지적인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것은 강력한 정치체가 오랫동안 성립되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지역의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주로 평야지역에 위치한 마한남부 연맹왕국들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진한이나 변한지역과 비교할 때 대국과 소국 간의 세력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연맹간의 힘의 우열에 따른 통폐합보다는 서로 공존하는 협력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마한의 읍락 우두머리들이 일반민들과 잡거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과도 서로 통하고 있다. 즉, 이 지역에서 아직 계층분화 현상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편인 셈인데, 4세기 이후에까지도 철제 대신 목재 농기구가 광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영산강 유역권은 다른 지역보다 연맹간의 분립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서로 협력하며 연맹체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영산강유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공통된 특질과 더불어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 현상은, 이처럼 마한남부 연맹 구성원이라는 정치적 특징을 반영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성격도 아울러 지닌 연맹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에서 확산성과 통일성이 많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이처럼 다른 연맹체를 압도할 강력한 연맹체가 존재하지 않고 서로 분립성을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라와 가야 등과 비교하여 이 지역의 경우 정치체가 ‘짧은’ 시간 병존함으로써 통일성과 확산성이 형성될 틈이 없었다고 살핀 것은, 진한, 변한 지역과 달리 이 지역 정치체들의 세력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 지역은 규모가 비슷한 연맹체들이 고유의 토착성을 바탕으로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며 마한남부 연맹체로서의 유대감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출토 토기들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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