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2>마한 동부의 대국 ‘불사분사국’(上)

보성 금평마을 패총 보성군 벌교읍 척평리 금평 마을 어귀에 있는 원삼국 시대의 조개무지(패총) 전경. 1992년 목포∼순천간 고속도로 공사과정에서 발견돼 3세기 후반을 중심 연대로 하는 다수의 경질 무문토기와 타날문 토기, 동물형 토제품, 도자병, 복골 등이 출토되어 남해안 원삼국 시대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래사진은 이곳에서 출토된 점뼈.

앞서 구례 용두리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계 유물들을 가지고 백제와 가야의 교류 관계를 살필 수 있다는 일부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짧게 피력한 바 있다. 이들 지역에서 가야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남동부 일대를 ‘가야문화권’으로 분류하는데 흔쾌히 동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전남동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가야문화 흔적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의 의문이 생긴다. 말하자면 두 지역이 섬진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교류가 활발하여 서로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정치적인 영향력 확대로까지 지나치게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개장터’라는 노랫말에도 있듯이 섬진강의 작은 지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지역은 음식 맛조차 전라도와 경상도로 구별될 정도로 차이가 있다는 진주가 고향이신 대학 은사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이는 두 지역이 오랫동안 서로 문화권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각기 다른 정치체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토착적 고유문화 발전시켜

 

보성 금평마을 패총 보성군 벌교읍 척평리 금평 마을 어귀에 있는 원삼국 시대의 조개무지(패총) 전경. 1992년 목포∼순천간 고속도로 공사과정에서 발견돼 3세기 후반을 중심 연대로 하는 다수의 경질 무문토기와 타날문 토기, 동물형 토제품, 도자병, 복골 등이 출토되어 남해안 원삼국 시대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래사진은 이곳에서 출토된 점뼈.

북쪽의 내륙지역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 동부지역은 섬진강이 보성강과 합류하여 남해로 흐르지만 비좁은 분지에 부분적으로 발달한 곡간 평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소국들이 분립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만큼 재지적 전통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산강 유역이나 가야 등 외부문화가 유입된 흔적은 많이 확인되나 그렇다고 그것이 토착적 요소를 바꿀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남 동부지역이 ‘가야문화권’에 편입되었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전남 동부지역이 지리적으로 영산강 유역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가야문화권에 보다 많이 노출된 탓으로 가야문화 요소가 많이 보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가야문화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자주 강조하였지만, 영산강유역의 넓은 충적평야를 중심으로 마한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던 반남일대의 ‘내비리국’과 해남반도의 ‘침미다례’는 마한 남부연맹의 중심국가로 백제 연맹체가 쉽게 넘볼 수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 대군을 격파했던 백제 근초고왕조차 마한 남부연맹 세력을 굴복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가야와 왜와 통교하려던 백제는 전남 서남해안을 경유하는 항로가 마한 남부연맹에 막히자 험준한 덕유산, 지리산 길을 넘어 섬진강 수계를 따라 남하한 후 가야를 통해 왜와 연결을 시도하였다. 이는 당시 마한 남부연맹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를 웅변해주고 있다.

지형조건 대국형성 가로막아

경남 서부권은 지리산 등 높은 산지, 황강·남강 수계에 둘러싸인 분지와 복잡한 해안선으로 이루어져 여러 정치체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 때문에 6세기 백제와 가라국의 대립에 휘말리어 제대로 발전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외세의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렸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경남 서부권과 비슷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전남 동부지역은 교통로가 발달하지 않아 외부문화의 유입이 적어 정치적 발전이 상대적으로 미흡하였다. 비록 해안지역의 경우 해남반도나 고흥반도처럼 반도가 돌출되어 대외문물이 유입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는 하였지만 자체 연맹세력이 미약하여 남해안의 맹주였던 득량만의 ‘초리국’에 의지하는 형국이었다. 이렇다보니 이들 지역은 영산강유역 연맹왕국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득량만 연안이나 보성강유역의 연맹왕국보다 정치적 발전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지석묘 분포와 지명

전남지역 지석묘를 연구한 이영문 교수는 천관우 선생이 비정한 전남지역의 13 마한소국과 지석묘 밀집군이 비교적 일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전남 동부지역의 지석묘 분포지역 가운데 득량만 일대, 보성강 중류지역, 순천 낙안일대가 가장 밀집도가 높아 그곳에 연맹체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낙안 분지에는 모두 39개群 24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정치세력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곳의 정치세력을 구체적으로 특정짓는 것은 쉽지 않으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언급된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낙안군이 백제 때 분차군(分嵯郡) 또는 부사군(夫沙郡)이었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한 천관우 선생은 ‘夫沙’의 古音 ‘piu-sa’와 ‘不斯’의 古音 ‘pieu-sie’가 음이 서로 비슷하고 ‘濆邪’의 ‘puǝn-ia’는 ‘벌판’을 뜻하는 ‘伐’과 같은 접미사로써 ‘불사분사국’은 ‘벌판’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 실제 ‘불사분사국’이 있었던 곳에 가보면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직경 10㎞ 미만 정도의 낙안분지가 있어 이곳에 대국 규모의 정치제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훗날 백제시기에 군치(郡治)가 설치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려 이전의 분차군의 치소는 현재의 낙안읍성 자리가 아니라 벌교 고읍리 일대였다. 이곳에서 낙안면 옥산리(7개군 39기)와 벌교읍 지동리(3개군 34기) 두 지역 지석묘가 가장 밀집되어 있다. 특히 지석묘 30기가 밀집되어 있는 지동리를 중심으로 옥산리, 고읍리 지역이 반경 5㎞ 이내에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이 연맹왕국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지석묘의 밀집 규모만 가지고 비교해 보면 인근 득량만 연안의 초리국 연맹체보다 작은 연맹왕국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제 멸망 후 당이 설치한 7주(州) 가운데 하나인 ‘분차주’의 치소(治所)를 ‘대동지지’나 ‘동사강목’ 등이 ‘분차·부사’ 지명에 의거하여 낙안과 관련있다고 생각한 이래, 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분차주’가 ‘본래 파지성’이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치소가 낙안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만은 없다. ‘파지’가 보성 복내를 뜻하는 ‘파부리’와 음이 비슷한 것을 고려하면 ‘분차주’ 치소가 처음에는 보성 복내 지역에 있었으나 후에 낙안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석묘와 패총 유물

 

분차주 관할 4현 가운데 하나인 ‘군지현(軍支縣)’이 주목된다. ‘대동지지’와 ‘동사강목’에서는 벌교읍 마동리에 있는 ‘군지 부곡’으로 비정되고 있다. 현재 칠동리, 척령리, 장좌리 등이 모여 있는 이곳은 약 6×1.5㎞, 9㎢의 정도로 낙안분지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의 군(郡)과 현(縣)이 연맹왕국 시대의 ‘국읍’, ‘읍락’과 각각 비교된다는 견해를 참고해 보면 ‘군지현’은 ‘불사분사국’에 속한 읍락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곳은 현재 마동리에 3개군(群) 21기를 비롯하여 6개군 27기의 지석묘가 산재해 있어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마동리 바로 동쪽에 있는 보성 벌교읍 척령리 금평마을에 있는 패총유적이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원삼국 시대의 조개무지(패총)인데, 지동리 지동마을과 인접해 있다. 1992년 목포∼순천간 고속화도로 공사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송국리형 주거지 1기, 원삼국 주거지 2기, 수혈유구 2기, 구상유구 3기 등이 조사된 것으로 보아 주거지가 폐기된 뒤, 그 위에 패총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3세기 후반을 중심연대로 하는 다수의 경질 무문토기와 타날문 토기, 동물형 토제품, 도자병(刀子柄), 복골 등이 출토되어 전남 남해안지역 원삼국 시대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환호에 3겹이 돌고 있는 이 패총은 그 규모가 길이 200m×너비120m 정도로 조성리 유적의 길이 500m×너비 200m와 비교하여 훨씬 작지만, 1겹이면서 대형인 조성리 유적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금평 패총은 규모면에서 조성리 패총의 6분의1 수준이지만 해안의 독립 구릉에 입지하여 방어적 성격의 환호가 있는 점 등은 조성리 패총과 유사한 형태이다. 패총이 대규모 집단을 이룬 집단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금평 패총이 있었던 곳과 바로 인접한 마동리 군지마을이 당시 읍락의 중심지를 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마한 연맹체 상호교역 활발

불사분사국은 이러한 읍락들로 구성된 국읍, 즉 대국이었다. 금평 패총에서 출토된 복골(卜骨)은 해남 군곡리 패총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들 지역이 대외무역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복골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바로 이러한 결론은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 말하자면 바로 인근 득량만 일대에서 대국을 형성한 ‘초리국’이 대외무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미약한 ‘불사분사국’이 그들을 밀어내고 교역권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금평 유적에서 출토된 복골은 득량만 연맹왕국 상인들이 인근 연맹왕국과 교역했던 품목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보성강 유역의 석평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도 보면 군곡리와 조성리 것과 유사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결국 이들 연맹체들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를테면 금평 유적의 출토 복골은 그 지역 연맹체들이 직접 중국과 교역을 하였다고 살피기보다는 마한 연맹체 내에서 상호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