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 남해군. 육지와 섬이 다리로 이어져 있어 육로를 이용한 접근이 쉽다. 섬의 특성상 대중교통은 버스만 가능하다. 현재 경남도 차원에서 철도건설에 대해 검토를 하고 있다고 한다. 1개 읍과 9개 면으로 이뤄져 있는 남해군은 다양한 생태관광지와 이색적인 풍경의 마을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예전에는 남해 금산, 보리암, 호구산, 용문사 등이 역사 관광지와 사찰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추세가 많이 바뀌었다.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3위에 선정된 가천다랭이마을과 앵
일제 극우파와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120년 끌어올리는 논리일본서기 신공 55년(서기 255년)조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편 백제본기 백제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조에 “겨울 11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신공 9년과 신공 49년 신공황후의 황당무계한 삼한정벌론과 임나일본부설 기사에 맞추기 위해 120년 끌어올려 연대를 조작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황당하게도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 가야를 정벌하고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마한
반남 지역과 ‘반나부리’2009년 동신대 박물관이 자미산성을 발굴하였을 때 발견된 ‘반내부(半乃夫)’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와가는 자미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반남군은 백제 반내부리(半奈夫里)인데, 경덕왕 때 반남군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내용이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반남폐현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라고 실려
계단식 농사를 짓던 곳전라북도 고창군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보물 7가지를 가진 도시다. 세계유산(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 무형문화유산, 생물권보전지역과 올해 인정된 세계기록유산과 세계지질공원까지 갖추었다.운곡람사르습지 일대는 과거 주민들이 거주하며 계단식 농사를 경작하던 곳이었다. 1980년대 영광 한빛원자력발전소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운곡저수지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원주민들은 경작지와 살던 집을 두고 떠나왔으며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출입이 통제된 경작지와 주변 자연환경은 인간의 접촉과 간섭이 단절되자 엄청난 변화가
이제 죽정마을을 떠나 구림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옛사람들은 죽정을 ‘웃사우’, 신흥동을 ‘아랫사우’라고 했으니 사실상, 이곳 죽정마을도 크게 보면 구림마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기동에 있던 구림마을 서당(성기서재)을 죽정마을 뒷산 문수암터로 이건하여 문수서재(문산재)를 설립한 것만 봐도 죽정마을은 구림마을과 한 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림마을 사람들이 직접 쓴 책 「호남명촌 구림」에도 “옛날에는 열다섯 동네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보통 구림 열두 동네라고 불린다. 지금은 동구림, 서구림, 도갑리를 구림이라 한
마한사에 관심을 가졌을 때 필자가 생각한 가설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에 고대 마한 왕국의 중심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도 이 지역에서 자체 제작한 왕관으로 이 지역 연맹왕국 왕국의 국왕의 왕관으로 보았다. 금동관이 백제왕이 이 지역 ‘수장급 최고 우두머리’에게 준 위세품이라고 본 기존 학설을 정면 비판하였다. 때마침 발굴된 시종 내동리 쌍무덤 출토 금동관 편이 신촌리 9호분과 동형이라는 사실은 필자의 이러한 추론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필자는 시종·반남에 있었던 마한 왕국이 삼
무등산 평촌 명품마을은 광주 시내를 벗어나 광주광역시 북구 평촌길 무등산 국립공원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무등산 평촌 명품마을은 동림, 담안, 우성, 닭뫼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된 생태관광 지역이다. 마을 중심에 흐르는 풍암천에는 반딧불이가 서식하고, 무등산 깃대종인 천연기념물 수달이 서식하는 생태 환경적으로 매우 우수한 마을이다. 또한, 예로부터 분청사기를 만들던 지역으로 현재는 ‘평촌도예공방’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평촌 명품마을은 국립생태원에서 지정한 생태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다. 또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에서 지정한 국립
죽정마을 여기저기를 답사하던 중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영암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월출산 생태탐방원’ 유치에 이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와 함께 걱정도 들었다. 최근 경남 김해의 ‘가야사 복원’ 사업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 왜곡 사건과 현재 전라남북도와 광주시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출간하기로 한 ‘전라도 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심각하게 마한과 백제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실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마한(馬韓)을 강조하기 시작한 우리 영암은 이러한 식민사관의 역사,
마한 정체성은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기까지도 이어졌다고 필자는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800년 넘게 고유한 문명을 이룩한 그 정체성의 뿌리가 강고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나라를 세울 때 마한의 정체성을 계승하겠다고 한 것은 전라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인식된 마한의 힘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5월 12일 견훤 대왕이 세운 후백제의 역사를 찾고자 전북일보 취재팀이 광주, 나주, 영암 지역을 찾았다. 이들 일행을 필자는 견훤과 왕건이 대회전을 한 영암 덕진강 전투 현장, 견훤의 전방 지휘본부 구실을 한 자미산성, 후백제와
문산재 안내판 내용문산재 왕인박사 수학지(修學池)인 유교적 칭호로서 주지봉(문필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는 약 200여평 되는데 석축대가 있고 앞에는 석탑대 주축돌이 발굴된 백제때의 와당, 신단대 등이 있으며 조선기 도기 파편도 있고 아래에는 성천(聖泉)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우물이 남아 있으며 문산재에서 유생들이 수학하여 인재가 많이 속출된다는 소문이 전차되자 문인재사와 수학자들이 각처에서 운집하여 군자 석학을 수없이 배출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양사재가 있는데 이른바 유생들이 수학하는 서원식재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죽음의 공포, KBS 광주방송총국 청사공포에 떨며 죽음을 기다렸던 KBS 직원 10여 명은 모두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5월 20일, 이날 밤 10시쯤 MBC가 불에 타 전소되었고 다음날 5월 21일 새벽 5시 15분쯤 KBS 광주방송국도 결국 불에 타버렸다.그 후 KBS 광주의 모든 보도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때부터 서울 본사에서 긴급 취재반이 내려와 서울뉴스에 참여했다. 보도에 참여하지 못한 KBS 광주 기자들은 자신의 취재 수첩에 당시 각종 민주화운동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정부에서 뿌린 각종 인쇄물을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옛 유적영암군과 (재)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발행한 ‘영암 월출산 월산사지 3차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어떤 이유에서 발굴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발굴 동기와 3차에 걸쳐 진행된 발굴 과정이 다양한 도면과 사진이 함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월산사지 발굴조사는 세 단지로 구분하여 진행되었는데 1단지는 2004년과 2009년에, 2단지는 2013년에 이루어졌다.1단지에 대한 1, 2차 조사결과 조선시대 건물지 4동과 고려시대 건물지 5동이 조사범위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건물지는 기단과 초석, 계단, 배
죽정마을 30회를 끝으로 도갑리 연재를 마치고 구림마을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던 차에 한 독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월산마을에 거주하는 박창진(96세) 씨라는 분으로 월산사와 관련해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약속된 시간에 월산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월산사를 지키고 있는 혜심 스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도선국사 입문지’ 입석이 있던 곳혜심 스님이 향기가 은은하고 그윽한 목련꽃차를 내주며 월산사 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30여 년 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도선국사입문지’라고 음각된 오래된 입석이 있었습니다. 그
계엄군의 KBS 편파 보도 조작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3주년이 되었다. 1979년 10월 당시 KBS 본사 사회부에서 지방근무 1년 의무근무로 KBS 광주방송총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광주에 내려가 1년 동안 전남도경찰청과 광주경찰서 출입 기자로 근무했다. 광주에 내려간 지 6개월 만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다.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벌써 40여 년의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화운동 상처에 대한 치유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부상자, 실종자와 관련한 현안들이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이하 센터) 후보지가 영암으로 결정되자 필자에게 축하 전화가 많이 왔다. ‘영암’ ‘나주’ ‘해남’ 등의 특정 지역을 넘어 영산강 유역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류임을 밝히려 노력한 필자는 영산 지중해의 중심에 있는 나주·영암 어느 곳에 센터가 들어서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다. 그런데도 이번 센터 후보지 선정은 영암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이었다.오롯이 간직한 마한의 정체성나주는 국립나주박물관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등 국립 연구기관이나 관람시설이 2개소나 있지만, 나주에 버금가는 영암은 우리나
선인동 삼효문월산마을에서 벚꽃 가로수길을 따라 죽정마을로 가다보면 월악동 못미처 오른편 길가에 작은 정려문과 비각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김해김씨 삼효문이다. 정려문 우측에는 김씨 문중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 설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행삼효정려문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395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삼효문은 김해김씨 사군파 양무공 김완 장군의 십세손이신 성린공의 영모각, 정묵공의 실적비각, 사윤공의 삼효각으로 효행 삼효 정려문이다. 고종 24년(1887년)에 성린에게는 증(贈)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명하고
제18회 시종면민의 날이 지난 4월 21일 있었다. 마한 시대의 복장을 하고 깃발을 들고 시종면 소재지를 돌아 행사장인 시종초등학교로 들어가는 행렬이 장관이었다. 재경향우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찾은 출향인과 지역 주민들이 4년 만에 열린 행사에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하루 전,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 유치가 발표되어 행사를 더욱 뜻깊게 하였다. 필자도 행사에 참여하여 옥야리 주민들이 정성껏 마련한 ‘마한 밥상’을 대접받았다. 시종은 대한민국 마한 유산의 최대 보고(寶庫)이다. 이곳에는 50기가 넘는 대형고분이 밀집된 고분군과 전국
국장생이란, 말 그대로 나라의 명으로 건립된 장생이란 뜻이다. 사찰의 경계 표시뿐만 아니라 비보(裨補)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장승이라고 불리었다. 죽정마을 국장생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거친 표면에 국장생(國長生) 세 글자의 한자를 크게 새겨 넣었다. 안내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영암 죽정리 국장생은 돌로 만든 장승으로 ‘영암 죽정리 국장승’으로도 불린다. ‘장생(長生)’이란 표기는 주로 신라와 고려 전기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전기 이후로는 ‘장승(長丞)’이라는 표기가 많이 보인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유치 쾌거4월 20일 역사적인 날이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영암으로 결정되었다. 뜬 눈으로 날을 새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마한의 심장, 영암’. ‘해상강국, 마한’,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허브, 마한’ 이러한 슬로건이 바로 ‘영산 내해’에 위치한 ‘영암 마한’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지역 균형과 역사 균형을 꾀하고자 한 전라남도의 꿈이 한 걸음 실현된 듯하여 기쁘다. 아울러 영암을 비롯하여 나주·해남 등 센터 유치를 추진한 다른 지역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비록, 영
문수신앙의 발원지, 월출산「동국여지승람」에는 월출산을 일러 ‘본국 밖(국외)에서는 화개산(華蓋山)이라 칭한다’는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국외(國外)’는 중국을 뜻한다. 화개산과 월출산 명칭에 대해서는 1663년에 간행된 「영암지도갑사사적」에 언급되어 있다. ‘옛날 문수대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구름이 항상 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서 화개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월출산」은 달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옛날에 지혜와 용맹을 주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는 문수대사가 월지국에서 나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