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93]
■ 구림마을(2)

일본 극우파들과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은 정상적인 일본인들도 안 믿던 『일본서기』 기년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대와 억지로 꿰어맞추기 위해 제멋대로 2주갑(二周甲)[120년]을 재조정했다.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일본사대사전’의 기년대조표는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 백제 8대 고이왕 15년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왕인박사 관련, 응신 15년은 서기 284년이며 백제 고이왕 50년과 연대가 같다. 원래 연대로 하면, 왕인박사는 아신왕이 아니라 고이왕 때 도일했다. 그러나 고사기에는 응신 20년(서기 289년) 왕인박사가 도일했다고 한다. 이때는 백제 9대 책계왕 4년 일이다. 8년의 간격을 두고 국가에서 편찬한 일본의 두 역사책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본 극우파들과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은 정상적인 일본인들도 안 믿던 『일본서기』 기년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대와 억지로 꿰어맞추기 위해 제멋대로 2주갑(二周甲)[120년]을 재조정했다.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일본사대사전’의 기년대조표는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 백제 8대 고이왕 15년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왕인박사 관련, 응신 15년은 서기 284년이며 백제 고이왕 50년과 연대가 같다. 원래 연대로 하면, 왕인박사는 아신왕이 아니라 고이왕 때 도일했다. 그러나 고사기에는 응신 20년(서기 289년) 왕인박사가 도일했다고 한다. 이때는 백제 9대 책계왕 4년 일이다. 8년의 간격을 두고 국가에서 편찬한 일본의 두 역사책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제 극우파와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120년 끌어올리는 논리

일본서기 신공 55년(서기 255년)조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조에 “겨울 11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신공 9년과 신공 49년 신공황후의 황당무계한 삼한정벌론과 임나일본부설 기사에 맞추기 위해 120년 끌어올려 연대를 조작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황당하게도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 가야를 정벌하고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마한을 완전 복속시켰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어느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근초고왕 24년 기사’를 보면 더욱 확실하다. 참고로 초고왕은 백제 5대 왕으로 제위 기간이 48년(166~214)이고, 근초고왕은 백제 13대 왕으로 제위 기간은 29년(346~375)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사대사전’의 기년대조표를 잘 살펴보면 서기 369년은 일본서기 인덕 57년에 해당한다. 신공 49년(서기 249)에다가 이갑자 120년을 더하면 서기 369년이 되는데, 그렇다면 인덕 57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조작하고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이 물려받은 식민사관을 21세기 대한민국 각 대학의 역사 교수와 한국사 박사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회, 교육부 관료들 모두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처절하게 왜곡되고 조작 날조되었건만 역사학자를 자처하는 어느 누구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앵무새처럼 잔악한 일제가 남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따라 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일본서기 120년 연대를 끌어올리는 기준은 「삼국사기」

“원래 일본의 고대사 연구가는 『일본서기』의 기년(紀年)(일정한 기원으로부터 계산한 햇수)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유력한 방증으로서 조선고사(朝鮮古史: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통감 등 한국기록)의 기년을 참고하고 더욱이 그 기사의 내용까지도 조선고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마니시 류(今西龍)’ 박사가 양국 고사의 근본적 연구 및 삼국사기가 이용한 지나사적(支那史籍: 중국 사료) 등의 연구로부터 종래 연구법을 일변하여 일본고사(일본서기·고사기)에 실려 있는 사실(史實)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나이토 도라지로/이마니시 류의 『백제사연구』 서(序))

일본 교토대학의 역사학계를 이끈 인물인 ‘나이토 도라지로’는 일본인들도 안 믿던  『일본서기』를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사실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고 실토했다.

<삼국사기>로 보는 369년 기사

근초고왕 24년(서기 369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호(民戶)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서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급하게 공격해서 쳐부수고 5천여 급을 얻고 사로잡은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했는데 깃발은 모두 황색을 썼다. <삼국사기, 백제 근초고왕 24년>
 
<일본서기> 신공 49년(서기 249년) 기사

「신공 49년 봄 3월,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고,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건너가서, 탁순국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했다. 이때 혹자가, “군사 숫자가 적으니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다시 사백·개로에게 (신공황후께) 상표를 올려서 군사를 더 청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신공황후가)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수이다]에게 정병을 주어 사백·개로와 함께 보냈다. 모두 탁순에 집결해서 신라를 공격해서 깨트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했다. 군사를 서쪽으로 돌려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백제에게 하사했다. 이때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 4읍이 자연히 항복했다.」

<일본서기 신공(神功:진구) 49년>

침미다례, 7국, 4읍 등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은 일본에서 찾아야
서기 249년, 즉 백제 고이왕 15년에 해당하는 일을 식민 강단사학자들은 120년이나 연대를 조작하여 근초고왕 24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며 신공황후 대신 근초고왕으로 주어를 바꿔 근초고왕이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마한을 정복했다는 소설을 쓰고 있다. 이 거짓 주장을 우리나라 모든 역사교과서 뿐만 아니라 ‘호남명촌 구림’지에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침미다례’ 위치를 해남으로, 탁순을 대구로 비정하는 등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로잡으려 하는 사학자들이 없다. 마한사를 전공하고 연구한다는 교수나 학자들도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침미다례나 7국, 4현을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아예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왜 일본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이름도 안 나오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찾으려고 하는지 그 작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영암에서 유치한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의 앞날이 걱정되는 이유다. 

왕인박사와 고사기 응신 20년(서기 289년) 

→ 백제 9대 책계왕 4년
일왕은 또한, 백제국에 “백제에 현자가 있으면 보내라”고하였다. 이에 그 명을 받아 (백제가)보낸 사람의 이름이 和邇吉師(와니키시)라 하였다. 논어 10권과 천자문 한 권,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부쳐 보내왔다. [이 和邇吉師(와니키시)가 文首(후비토)의 시조이다.]

<又, 科賜百濟國, 若有賢人者, 貢上. 故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即論語十卷 ・ 千字文一卷, 并十一卷, 付是人即貢進.【此和邇吉師者, 文首等祖】> (古史記 応神 20年)

왕인박사와 일본서기 응신 15년(서기 284년 8月 6日)  → 백제 8대 고이왕 50년

15년 가을 8월 임신삭 정묘(6일)에 백제왕(17대 阿莘王, 아신왕 14년)이 아직기(阿直伎)를 파견하여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다. 경(輕;카루)의 언덕 위의 마구간에서 기르도록 하고 아직기(阿直岐)에게 사육하는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말을 사육하는 곳을 구판(廐坂;우마야사카)이라고 불렀다. 아직기는 경전도 잘 읽었으므로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우지노와키이라츠코)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이 아직기에게“너보다 훌륭한 박사가 있느냐?”고 묻자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모야군(上毛野君;카미츠케노노키미)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무별(巫別;카무나기와케)을 백제에 보내 왕인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아치키노후비토)의 시조이다.

<十五年 秋八月壬戌朔丁卯, 百濟王遣阿直伎(岐), 貢良馬二匹. 卽養於輕坂上廐. 因以阿直岐令掌飼. 故號其養馬之處, 曰廐坂也. 阿直岐亦能讀經典. 卽太子菟道稚郞子師焉. 於是, 天皇問阿直岐曰, 如勝汝博士亦有耶. 對曰, 有王仁者. 是秀也. 時遣上毛野君祖, 荒田別·巫別於百濟, 仍徵王仁也. 其阿直岐者, 阿直岐史之始祖也>( 日本書紀 応神 15年) 

일본서기 응신 16년(서기 285년 2月) → 백제 8대 고이왕 51년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는 왕인을 스승으로 삼았다. 여러 전적을 배우니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후미노오비토)의 시조이다.
<十六年 春二月, 王仁來之. 則太子菟道稚郞子師之. 習諸典籍於王仁. 莫不通達. 所謂王仁者, 是書首等之始祖也>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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