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55] 김헌창의 난을 통해 본 마한의 정체성 재론(하)

마한 정체성은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기까지도 이어졌다고 필자는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800년 넘게 고유한 문명을 이룩한 그 정체성의 뿌리가 강고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나라를 세울 때 마한의 정체성을 계승하겠다고 한 것은 전라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인식된 마한의 힘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5월 12일 견훤 대왕이 세운 후백제의 역사를 찾고자 전북일보 취재팀이 광주, 나주, 영암 지역을 찾았다. 이들 일행을 필자는 견훤과 왕건이 대회전을 한 영암 덕진강 전투 현장, 견훤의 전방 지휘본부 구실을 한 자미산성, 후백제와 고려 군대가 마지막 혈전을 벌인 승촌보 일대를 안내하였다. 덕진강 전투 현장에는 김한남 영암문화원장이 동행하여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마한의 심장, 영암이 후삼국기에도 여전히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덕진강 전투는 별도로 정리하고자 한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 유치와 관련한 특집으로 김헌창의 봉기와 관련된 얘기를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과 옛 향수

견훤 대왕이 광주(무진주)에서 무려 8년 동안 세력을 형성하였음에도 결국 완산주(전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때 마한 계승을 강조한 것은 영산강 유역에 형성된 마한의 정체성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참가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였던 김헌창의 난은 왕경 편에 선 삽량주 만을 제외하고 지방과 중앙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국적 규모로 난이 일어난 것은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깊어졌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옛 통일 이전 신라지역에 속한 삽량·사벌·청주 가운데 사벌과 청주 두 주는 난에 가담하였으나 삽량주는 빠졌다. 삽량주 중앙에 섬처럼 갇혀 있는 금관경은 난에 가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원래의 신라와 가야의 영역 가운데 왕경과 가까운 삽량주 외에는 모든 지역이 난에 참여하고 있다.  

일찍이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금관 가야계는 법흥왕 때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 진골 귀족에 편입된 신귀족이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국왕 이상의 권력을 행사한 이들은, 경주 진골 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 하대에 들어 정치적으로 몰락의 길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김유신계의 불만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이 옛 가야에 대한 향수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답설인귀書’로 유명한 강수는 삼국사기에서 ‘임나가야인’이라고 적고 있다.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가야 왕조에 대한 향수가 통일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옛 왕조에 대한 향수는 백제인(마한인?) 임을 강조한 진표 스님의 사례나, ‘마한·백제’의 전통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견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덕왕 2년(827)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가져 왔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구덕이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겠으나 굳이 ‘고구려승’이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데서 멸망한 고구려 왕조에 대한 기대와 향수가 여전함을 알 수 있겠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와 가야계 일부에서 ‘임나왕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옛 왕조에 대한 계승의식은 고려 시대에도 여전하였다. 무신정권 시대에 일어난 하층민의 반란 가운데 전남 담양에서 일어난 이연년, 경주에서 일어난 김사미·효심의 난은 각각 백제와 신라계승이 내면에 있었다.

골품체제 중심의 구조적인 모순

통일신라 시대에는 골품체제를 중심으로 경주 중심의 정치가 더욱 강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 경주와 비경주, 신라와 비신라의 갈등은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구조적인 모순이 쌓여갔다. 삼국통일에 결정적 공을 세웠던 김유신 가계조차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이다 보니 다른 사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김유신의 식읍이 있었던 금관경 지역에서 가졌던 정치적 박탈감은 매우 높았다. 이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동참하였던 이유라 하겠다.

그런데 한산·우두주(삭주)와 북원소경(원주)은 난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난을 예측하고 군사를 일으켜 방비하였다고 되어 있다. ‘예측하고’라는 데서 사전에 김헌창과 교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경기도 여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옛 고구려 지역도 신라 중앙정부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곳에 파견된 지방관이 친정부적 인물일 가능성과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적어 불만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은 통일 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충돌하여 끊임없이 정치적 주도세력의 변화가 나타난 곳이었다. 마한이나 가야처럼 그 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형성될 여유가 없었던 점이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추론은 남원소경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실에서 가능하다.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청주 안에 있는 서원경처럼 완산주 영역 안에 있는 남원소경은 당연히 난에 가담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혀 반란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법하다. 남원소경이 원래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세운 보덕국이 멸망한 이후 그 지역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지역이라고 하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계가 대부분인 남원소경은 난이 일어났을 때 다른 지역 고구려계의 동향을 지켜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대가야계 주민들이 이주한 국원소경(충주)이 난에 가담하였다. 이는 가야계가 난에 가담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강고하게 형성된 마한의 정체성

김헌창은 일찍이 무주 도독을 역임하며 이 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된 마한 정체성을 주목하였을 법하다. 무주나 완산지역 주민들은 경주 중심의 정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거기다 연속된 흉년으로 민심 이반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주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신라 사회의 모순을 김헌창은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안’이라는 국호를 표방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마한계, 백제계, 가야계, 고구려계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지역의 지향하는 바는 각각 달랐다. 말하자면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려 하였지만 각 지역이 지닌 차이를 하나로 엮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부족하였다. 다만 국호를 ‘장안’이라 하여 중국 당과 대등한 수준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각 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당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백제나 고구려 주민들에게 당의 서울인 ‘장안’을 국호로 삼은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헌창 군대 또한 연합군이 아니라 각기 분산된 것이어서 진압군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는 한계를 드러냈다.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신라 중앙정부는 이들 지역에 대한 정치적 유화책을 썼다. 난에 가담하다 체포된 지방세력들을 곧장 사면했다. 특히 무주지역에는 청해진과 같은 독자적 군진을 인정하였다. 1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할 힘을 부여한 것은 무주지역의 강고한 마한의 정체성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상실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삼국 정립 기운이 바야흐로 나타나고 있었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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