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홍-정치학박사-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 生-가나문화콘텐츠그룹부회장-전 KBS 제주방송총국장-전 경기대 영상미디어학과 교수-전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윤재홍-정치학박사-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 生-가나문화콘텐츠그룹부회장-전 KBS 제주방송총국장-전 경기대 영상미디어학과 교수-전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죽음의 공포, KBS 광주방송총국 청사

공포에 떨며 죽음을 기다렸던 KBS 직원 10여 명은 모두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5월 20일, 이날 밤 10시쯤 MBC가 불에 타 전소되었고 다음날 5월 21일 새벽 5시 15분쯤 KBS 광주방송국도 결국 불에 타버렸다.

그 후 KBS 광주의 모든 보도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때부터 서울 본사에서 긴급 취재반이 내려와 서울뉴스에 참여했다. 보도에 참여하지 못한 KBS 광주 기자들은 자신의 취재 수첩에 당시 각종 민주화운동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정부에서 뿌린 각종 인쇄물을 수집하며 기자의 사명을 다했다. 이때 광주 시민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부녀자들이 시민군들에게 김밥과 주먹밥을 나눠주는 모습, 무장을 위해 탈취했던 무기 반납, 병원마다 구급약 조달과 헌혈을 하는 모습 등을 취재 수첩에 기록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도청 진압 작전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새벽 전남도청을 비롯한 광주 전역을 장악한 후에야 작전을 종료했다. 이날 오전 7시 공수부대와 24사단 병력에게 도청을 인계하면서 10여 일 동안의 광주민주화운동이 막을 내렸다.

필자는 42년이 지난 지금, “광주민주화운동의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썼는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며, 그 사명을 이행하는 것이 기자의 소명이다. 지금도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필자는 광주 근무를 마치고 1981년 본사 발령을 받았다. 당시 회사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한 공로를 인정하여 취재공로상을 받았지만, 기자로서 떳떳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공로상을 받은 것은 지금도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군부독재와 호남출신 언론인

호남출신 정치부 기자로서 10.26사태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 군부독재, 민주 정부까지 주역들을 취재했다. 지역감정은 여전히 한국정치사에 중요한 키워드이다. 호남출신 언론인이라는 배경은 군부독재에선 큰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부에서 벗어난 민주 정부에서 호남이라는 배경의 기자 활동은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군부독재에서 KBS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표적 언론기관이었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은 지역감정의 모태인 김대중 야당 총재를 의식해 모든 호남 출신의 기자들을 알게 모르게 항상 감시 대상으로 주시했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에서는 정보기관 요원들이 동교동 김대중 총재 자택에 드나드는 모든 언론인들을 수시로 체크했다. 이 가운데 특히 호남출신 언론인들의 출입에 감시가 심했다. 필자가 광주민주화운동 후 본사에 발령 났을 때 KBS 해직기자 대부분이 호남 출신이었다. 다만 호남출신이 너무 많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영남출신 몇 명을 해직기자 명단에 끼워 넣었음을 그냥 알 수 있었다.

필자가 광주에서 본사에 복귀했을 때 보도본부 간부와 선배들이 고생이 많았다며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당시 필자는 보도본부장에게 광주에서 고생을 했으니 정치부에서 일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건의했다. 보도본부장은 호남출신인 필자의 뜻을 받아들여 바로 정치부에 발령을 내주었다. 필자가 정치부 기자를 희망한 것은 우선 적성에 잘 맞았고, 입사 전부터 정치부 기자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정치부는 필자에게 새로운 분야였지만, 적성에 잘 맞아 바로 적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출신 기자로서 취재원을 만나거나 회사 내 생활하는 일에는 어려움을 느꼈다. 당시 호남 출신 선후배와 동료 기자들은 서로 잘 만나지도 못했고 지나가면서 눈웃음이나 짧은 안부를 묻는 것이 전부였다. 호남 출신들끼리 식사는 물론 커피 한잔도 함께 하는 일은 서로가 피할 정도였다. 군부독재 당시 호남출신 KBS 기자들의 애환이었다. 이는 특히 5.18광주민주화운동 발상지인 광주가 바로 호남이었기 때문이었다. 호남출신 KBS 기자들은 사내에서도 눈칫밥을 먹는 것처럼 남모를 아픔을 겪어야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잊혀져 가는 분위기였다. 언론계에서도 호남출신 언론인에 대한 차별을 점차 사라져 갔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회사 밖의 취재현장에서 특별히 감시받거나 홀대받는 일은 사라져 갔다. 회사 밖 취재  현장에서도 특별히 감시를 받거나 홀대를 받는 일은 없었다. 정치부 기자들은 청와대, 국무총리실을 비롯해 국회와 각 정당을 취재한다.

필자는 정치부 초년 기자 시절 군부독재가 만든 야당인 민한당과 국회 국무총리실를 출입했고 이곳에는 지역감정이 없다고 느꼈다. 청와대는 물론 국회와 각 정당은 출입 기자들의 신상카드 등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 취재 대상이 호남 출신이면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영남 출신이라고 해서 도움이 안 된 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지역감정은 특히 정부나 군, 경찰, 대기업 등 각계의 조직 인사에서 아직도 보이지 않게 계속되고 있지만, 신문방송 통신 등 각 언론매체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과 같은 지역감정은 엷어졌다고 느꼈다. 따라서 현재는 과거의 군부독재 시절과 다르게 기자들이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재현장에서 받는 차별은 전혀 없다고 판단된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3주년의 해를 맞아 필자는 30대 초반의 현역 언론인에서 70대 후반의 언론인이 되었다. 40여 년 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취재해 죽음의 위기까지 겪었던 아픔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바로 40여 년 전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절정이었던 구 전남도청 앞 광장 시위현장, 특히 옷을 발가벗겨 아스팔트 도로에서 손이 뒤로 묶인 채 군 트럭에 강제로 실려 가던 학생들의 모습, 계엄군이 시위대가 점령한 도청을 공격하는 총소리가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도 잠재웠던 공포, 계엄군에 의해 총살당한 수많은시민들이 싸늘한 시신들로 가득 찬 구 도청 주변 모습,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던 광주 부녀자들,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서 앞다투어 헌혈하는 광주 적십자병원의 시민들, 희생자의 관 앞에서 유족들이 통곡하며 취재 기자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모습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하다가 학생으로 오인되어 계엄군에 끌려가 한 달 이상 행방불명이 됐다가 풀려나 회사에 복귀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조달훈 후배기자의 억울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모두 5.18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했던 아픈 기억들이 기자 수첩에 아직도 기록으로 남아있어 그 날의 아픈 기억들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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