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58] 견훤과 왕건의 각축장이 된 마한 왕국 자미산성(중)

후삼국 시대에 견훤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나주 승촌보 일대의 모습,  저수지 건너편에는 용봉마을과 왕자봉이 자리하고 있다.
후삼국 시대에 견훤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나주 승촌보 일대의 모습,  저수지 건너편에는 용봉마을과 왕자봉이 자리하고 있다.

반남 지역과 ‘반나부리’

2009년 동신대 박물관이 자미산성을 발굴하였을 때 발견된 ‘반내부(半乃夫)’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와가는 자미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반남군은 백제 반내부리(半奈夫里)인데, 경덕왕 때 반남군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내용이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반남폐현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곧 현재의 반남면은 백제 때 ‘반나부리현’이었으나,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반나부리’와 이름이 비슷한 ‘반남’으로 개명하며 ‘군(郡)’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반남 ‘郡’에서 반남 ‘縣’으로 격하시켰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반남현’이라 하여 명칭이나 행정구역이 고려와 변동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반남면의 역사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반남지역이 백제 때 ‘반나부리’라고 불렀다면, 자미산성 터에서 ‘반나부’라는 명문와가 출토된 사실은 적어도 자미산성의 역사는 백제 시기까지 올라갈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백제 때 ‘반나부리’라고 불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도 밝혀졌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백제 때 나주에 ‘반내부리현’과 별도로 ‘발라군(發羅郡)’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이다. 발라군 명칭이 반나부리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반나부리’가 나주를 대표하였던 이름임이 분명하다. 반남지역을 뜻하는 ‘반나부리’가 나주를 대표하는 지명이 되었던 것이다. 

자미산성과 내비리국(內卑離國)

자미산성 터에서 ‘반나부리’ 명문이 출토된 것은 이곳이 반나부리현의 치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곧 반나부리현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자미산성이 당시 정치세력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자미산성은 백제로 통합되기 이전의 마한연맹 왕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 믿어진다. 더구나 자미산성이 덕산리 고분·신촌리 고분 등 마한연맹 왕국을 이끈 세력들의 중심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고분군을 조영한 왕국의 왕궁이 자미산성이라는 사실이 확고해졌다.

한편 ‘반내부리’라는 명칭은 당시 이 지역에 있었던 마한왕국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유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지역에 있었던 마한연맹 왕국이 마한 54국의 하나인 ‘내비리국(內卑離國)’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언어학적으로 ‘내비리국’의 ‘비리(卑離)’는 벌판을 뜻하는 ‘벌(伐)=부리(夫里)=평야’의 뜻이 있다는 육당 최남선 선생의 견해를 따를 때, ‘내(內)’는 ‘내 천(川)’의 의미이므로 ‘내비리국’은 ‘냇가가 있는 평야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이 명칭의 뜻은 자미산성 및 반남 고분군이 있는 반남 평야를 큰 내(川)인 삼포천를 비롯하여 작은 하천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내비리국’은 반남·시종 지역의 정치세력이 연합하여 세운 마한의 대국이었다. 1917년 발굴된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과 2019년 7월 새롭게 확인된 영암 시종 내동리 쌍무덤 출토 금동관편이 동형(同型)이라는 사실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면 ‘내비리국’ 명칭이 ‘반내(나)부리’라 하여 접두어 격인 ‘반(半)’이 왜 첨가되었을까? 그것은 백제와 마한이 통합될 때 마한연맹 왕국의 종주국을 자처한 내비리국은 끝까지 통합에 반대하였다고 본다. 반남지역의 토착성은 옹관 고분 중심의 영산강 유역에 석실분이 새롭게 들어올 때도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옹관 고분을 고집하고 있는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 및 백제와 통합을 추진한 마한 연맹체는 반남지역에 있는 내비리국 왕국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고 본다. 인접한 나주에 반나부리현보다 규모가 큰 별도의 ‘발라군’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더구나 내비리국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반쪽 낸다’는 의미를 담은 정치적 명칭으로 접두어 ‘半’자를 넣고, ‘현’으로 격하시킨 행정구역을 편성하였다고 본다.

자미산성과 성내마을

자미산성을 왕궁으로 둔 내비리국은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대외교역을 통해 거대한 마한왕국을 건설하였다. 동신대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당나라 ‘개원(開元)’ 명문 화폐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개원통보는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인 청동화폐로, 621년 처음 발행되었다. 자미산성에 출토된 ‘개원통보’를 동신대 발굴보고서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개원통보’를 모방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미 같은 시기의 부여 궁남지, 부소산성 등지에서 ‘개원통보’가 나온 것으로 볼 때 자미산성 출토 ‘개원통보’도 이미 백제 시기에 당에서 들어온 것임이 분명하다. 당 화폐가 자미산성에서 출토된 것은 내비리국이 백제에 통합된 후에도 여전히 영산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반남면 신촌리 성내마을은 자미산성의 4대문과 성터가 있어 ‘성내’라는 마을 명이 나왔다고 나주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왕건과 견훤이 진을 치고 싸웠던 자미산성과 당시 군마를 조련시킨 훈련장이 있으며 그 능선 밑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안’ 마을이라고 칭하며, 흰 염소의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백양골’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곧 자미산성 일대가 후삼국 시대에 견훤과 왕건 세력이 충돌한 격전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주시지』에도 견훤이 자미산성에 주둔하여 나주의 왕건과 대항하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 여겨진다. 

성내마을에는 토성이라고 전하고 있는 토축 구조물이 남아 있어 2003년 전남대 박물관이 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 삼국시대~고려시대 토기편과 청자, 분청사기, 명문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신촌리 토성 건물지 추정지역에서 ‘潘○’명 적갈색 연질 기와편, 성벽기초 추정지역에서 ‘潘南’명 연회색 경질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곧 성내마을이 있는 곳에 토성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자미산성과 성내마을 토성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지니며 이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신촌리 토성과 자미산성에서 함께 보이는 ‘官草’ 명 기와가 이를 뒷받침한다. 

자미산성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해상교통의 요지여서 견훤이나 견훤의 배후를 공격하는 왕건의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자미산성은 농성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보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고 직접 산성 밖으로 나와 공격하기에 유리한 여건을 갖춘 산성이었다. 이 산성을 먼저 장악한 쪽은 견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미산성이 있는 반남지역은 마한의 대국인 내비리국의 영광이 뿌리내려져 있는 곳이었다. 백제가 비록, 이 지역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半’이라는 접두어를 넣고 ‘군’보다 격이 낮은 ‘현’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하더라도 이 지역의 강고한 토착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통일신라 시대에 반내부리 ‘현’을 반남 ‘군’으로 승격시키고 있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반남지역은 견훤이든, 왕건이든 어느 한쪽의 손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말 견훤이 나주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기록을 보면 반드시 그러했다고 볼 근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