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는
언론이
없었다

계엄군의 KBS 편파 보도 조작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3주년이 되었다. 1979년 10월 당시 KBS 본사 사회부에서 지방근무 1년 의무근무로 KBS 광주방송총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광주에 내려가 1년 동안 전남도경찰청과 광주경찰서 출입 기자로 근무했다. 광주에 내려간 지 6개월 만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벌써 40여 년의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화운동 상처에 대한 치유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부상자, 실종자와 관련한 현안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더구나 5.18민주화운동의 가해자와 진상도 역사 앞에서 밝혀지지 않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가해자의 진실은 역사의 무덤 속으로 영원히 묻히고 말 것인지 답답한 심정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는 언론이 없었다. 계엄군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 모든 언론의 눈과 입, 귀까지 막아버렸다. 계엄군의 언론 통제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들은 전쟁 중 적군을 대하듯이 언론에 대한 강압적 명령과 지시로 만행을 저질렀다. TV와 라디오 뉴스는 전남도청 계엄사령부 언론검열단에서 검열을 받아야만 보도가 나갈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사실대로 기록한 부분의 취재기사는 ‘사슴을 가리켜 말’(指鹿爲馬)이라고 했던 시절이었다.

계엄군은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뉴스와 기사를 제멋대로 검열했다. 그들의 만행과 이로 인한 KBS의 편파보도,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사실들을 이대로 역사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다. 젋었을 때 현장취재를 다녔던 기자로서, 그리고 기자 정년 후 언론학을 가르쳤던 대학교수로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 된 사실들을 당시에 과감하게 폭로하지 못한 아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무척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계엄군들의 언론 사전검열은 광주 시민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민주화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왜냐하면, 학생과 시민들이 계엄군을 향해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장면은 TV에 나왔던 반면, 계엄군들이 시위대를 마구 구타하며, 도로 위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군용트럭에 강제로 태우는 처참한 모습은 계엄군의 검열과 삭제로 전혀 방송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노한 학생과 광주 시민들은 도청을 비롯한 주요 공공기관을 점령했다. 당시 시민군이 경찰서와 파출소 책상 위에 불어 있는 출입기자의 명단을 입수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항의 전화가 빗발치기도 했다.

필자는 KBS기자 신분을 감추기 위해 취재현장에서 안경을 벗고 얼굴에 약간의 검정 숯가루를 바르고 공장 직원처럼 허름한 복장으로, 때로는 외신기자 완장을 두르고 위장해 다녔다. 필자가 묵고 있는 친 누님댁까지 전화를 걸어 편파 보도를 항의하는 시민들의 분노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전남일보 사옥에는 “편파보도를 하는 KBS 윤재홍 기자를 죽여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고 수사기관에서 알려왔다. 필자는 이때부터 광주 시내 현장에서 직접 취재를 하지 못했다. KBS 광주총국 보도국에서 선배 기자들이 “윤재홍 기자는 1년만 광주에 근무하면 서울에 올라가니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국방송 뉴스 리포트는 혼자 담당해줘야겠네. 윤 기자는 서울에 올라가면 그만이지만 광주에 사는 우리들은 편파 보도에 앞장섰다가는 광주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 제발 부탁이네.” 라며 부탁을 해왔다. 필자는 어쩔수 없이 광주 선배들의 뜻에 따라 KBS 9시 TV 전국뉴스의 광주 민주화운동 리포트를 모두 혼자 담당해 보도했다. 이 때문에 필자에게 강력히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윤재홍 기자를 죽이라는 현수막까지 걸렸었다. 계엄군 휘하에서 어쩔 수 없이 보도를 해야만 했던 광주 민주화운동 편파 보도 사건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기자직을 사퇴하지 못했던 필자 자신을 후회하고 있다.

죽음의 공포 KBS 광주방송총국 청사
광주 민주화운동에는 목숨을 잃을 뻔했던 또 다른 아픔이 있었다. 지금의 광주역 맞은편 5층 종근당 건물을 KBS 광주방송 사옥으로 임대하여 사용하던 때였다. 당시 KBS 광주방송총국 사옥은 광주 서구 사동 사직공원에 새로 신축하고 있었다. 5월 20일 광주 MBC사옥이 불탄 데 이어 같은 날 바로 이곳 KBS 광주방송총국에 불을 지르기 위해 인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당시 KBS사옥 주변과 지하에 계엄군 1개 중대가 무장한 채 주둔해 있었다. 계엄군들은 KBS사옥에 화염병을 던지며 불을 지르기 위해 달려오는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면서 방어했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다. 당시 당직을 하고 있던 필자를 비롯한 기자와 PD, 엔지니어, 사무직 등 10여 명은 죽음을 눈앞에 둔 채 모두가 긴장하며 떨고 있었다. 3,4층에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다면 사옥을 둘러싼 시민들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그대로 있으면 질식사하거나 불에 타 숨질 수밖에 없는 매우 절박한 순간이었다.

기자 5년 차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긴장 속에 초조함으로 넋을 잃을 것 같았다. 연락이 두절된 서울의 홀어머니와 아내, 두 아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필자는 4층 화장실에서 실내로 올라온 최루탄 가스 때문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간신히 숨을 쉬었다. 3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 속에서 떨고만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나이 5세, 어머니 28세 때 6.25전쟁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처럼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아버지 뒤를 따라 가야만 하는지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KBS 기자가 된 것을 한없이 후회했다. 이때 광주역 앞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 탱크부대가 KBS 건물에 진입하면서 KBS 사옥에 불을 지르려던 시민들이 물러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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