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50] 김헌창의 난을 통해 본 마한의 정체성 재론(중)

‘마한의 심장, 영암’의 실체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마한역사 문화체험에 나선 지역주민과 외지인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마한의 심장, 영암’의 실체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마한역사 문화체험에 나선 지역주민과 외지인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유치 쾌거

4월 20일 역사적인 날이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영암으로 결정되었다. 뜬 눈으로 날을 새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마한의 심장, 영암’. ‘해상강국, 마한’,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허브, 마한’ 이러한 슬로건이 바로 ‘영산 내해’에 위치한 ‘영암 마한’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지역 균형과 역사 균형을 꾀하고자 한 전라남도의 꿈이 한 걸음 실현된 듯하여 기쁘다. 아울러 영암을 비롯하여 나주·해남 등 센터 유치를 추진한 다른 지역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비록, 영암이 선정되었지만 한 지역의 마한이 아닌 한민족 정체성의 근원이 마한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헌창의 난, 마한의 정체성

김헌창의 난을 재론하려는 까닭은 그 난이 후백제의 출현을 예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김헌창이 꿈을 이루지 못한 원인이 옛 마한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된 정체성의 실체를 알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김헌창의 난을 통해 800년 넘게 형성된 마한의 정체성이 통일 신라 말까지도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주원계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일으킨 난에 가담하지 않았다. 김주원 일가는 권력 다툼에서 비록 패배하였지만, 김주원 자신이 바로 ‘명주군왕’으로 봉해지고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받는 등 최소한의 권력은 유지되고 있었다. 명주는 현재의 강원도 강릉 지역이다. 큰아들 김종기는 원성왕 6년 시중 직에 올랐다. 이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김주원보다 밀린 김경신계가 김주원계를 포용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꾀하려 한 결과였다. 

헌덕왕 대에 가서도 김주원의 둘째 아들 헌창을 무진주 도독·시중·청주(菁州) 도독·웅천주 도독을 역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원성왕 계와 김주원 계가 타협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성왕계와 김주원계는 긴장 속에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를 잇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에서 난을 일으켰다는 ‘삼국사기’ 해석은,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집권 세력이 난의 정치적 함의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한 것이었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던 실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의 의도가 반영된 기록

김헌창이 난을 도모하였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지역 간 참여 의지가 일정하지 않고 치밀하게 계획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청주(현재 진주) 도독 향영은 추화군(현재 밀양)으로 달아났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북방 지역은 난의 낌새를 먼저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방어하였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김헌창의 난에 지방세력 간에 입장의 차이가 약간 있다 하더라도 왕경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이 호응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는 웅천주를 비롯하여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 등 9개 주 가운데 5주, 그리고 5소경 가운데 국원·서원·금관소경 등 3 소경이 가담하는 등 신라 대부분 지역이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들 지역이 난에 가담한 것을 ‘김헌창의 위협’ 때문이라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사벌주(현재 상주)나 청주(현재 진주)는 오히려 왕경인 경주와 가깝고 반란군의 거점인 웅천주(현재 공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단순히 협박 때문에 난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왕경과 가까운 금관경(현재 김해)이 난에 가담한 것은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김헌창이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김헌창의 ‘위협’ 때문에 지방세력들이 어쩔 수 없이 난에 가담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모반의 부당성을 대외에 알려 진압 명분으로 삼기 위함과 동시에 ‘난’이 지닌 의미를 애써 축소하여 실상을 호도하려는 신라 정부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헌덕왕의 동모제인 상대등 김수종이 새로이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에 들어왔고, 또 다른 헌덕왕의 아우인 김충공이 김수종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김수종은 뒷날 헌덕왕 뒤를 이어 즉위한 흥덕왕을 말한다. 그는 형인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다른 아우 김충공은 상대등에 취임하자마자 ‘정사당에 앉아 내외 관원의 인사를 전형’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인사권을 가졌다. 이제 권력은 헌덕왕, 김수종, 김충공 등 3인이 분점하고 있었다.  

이들 3인은 시중 직에 있던 김헌창을 불과 1년 5개월 만에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청주 도독으로 보내 무려 5년 넘게 근무케 함으로써 견제를 하였다. 더구나 권력이 헌덕왕 3형제에게 집중되면서 소외된 중앙귀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곧 특정세력의 권력 독점은 같은 중앙귀족 내부에서, 그리고 중앙과 지방세력 사이에서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불만이 여러 지역의 지방 장관이 동시에 거병에 참여하는 계기였다.

게다가 이 무렵 신라에서는 가뭄 등 계속된 천재지변으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였다. 814년(헌덕왕 6) 나라 서쪽에 물난리가 난 것을 시작으로, 815년(헌덕왕 7)에는 지역에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였고, 816년(헌덕왕 8)에도 기근이 들어 170명이 당으로 먹을거리를 찾아 나섰으며, 817년(헌덕왕 9) 기근, 819년(헌덕왕 11)에는 초적이 전국에서 일어났으며, 821년(헌덕왕 13)에는 기근으로 심지어 아이를 내다 파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연속된 흉년은 민심을 흉흉하게 하여 신라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재난은 ‘국서(國西)’, ‘서변(西邊)’ 등의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주로 무진주, 완산주, 웅천주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인 곤궁함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 곳은 대체로 옛 백제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의 백성들은 신라 정부에 대한 불만을 넘어 옛 왕조에 대한 향수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마한 이래 형성된 강고한 정체성이 오랫동안 뿌리내려져 있는 무진주나 완산주 지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강하게 분출되고 있었다. 과거에 무진주 도독을 역임한 김헌창은 이러한 이 지역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옛 백제의 왕도였던 웅천주 도독을 현재 재임하고 있었기에 이들 지역 백성이 지닌 신라 정부에 대한 반발과 옛 왕조에 대한 향수가 깊어지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헌창이 이를 이용하려 하였음은 당연하다. 그가 반란의 명분으로 새 왕조 건설을 표방한 이유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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