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재 안내판 내용

문산재 왕인박사 수학지(修學池)인 유교적 칭호로서 주지봉(문필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는 약 200여평 되는데 석축대가 있고 앞에는 석탑대 주축돌이 발굴된 백제때의 와당, 신단대 등이 있으며 조선기 도기 파편도 있고 아래에는 성천(聖泉)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우물이 남아 있으며 문산재에서 유생들이 수학하여 인재가 많이 속출된다는 소문이 전차되자 문인재사와 수학자들이 각처에서 운집하여 군자 석학을 수없이 배출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양사재가 있는데 이른바 유생들이 수학하는 서원식재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건물은 문산재 27평, 양사재 13평을 1985년 7월 착공, 1986년 11월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문산재 뒷산 월대암 밑에는 왕인이 책을 보관해두고 사용했다 책굴이 있으며 그 입구 쪽에는 왕인을 기리기 위하여 수학자들이 세운 왕인의 석인상(石仁像)이 서 있다.

이 안내판에는 문산재 약수터인 돌샘, 즉 석천을 성천으로 왜곡해 놓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성천(聖泉)으로 둔갑된석천(石泉) 
구림마을에 서호 10경이 있고, 모정마을에 원풍정 12경이 있다면, 죽정마을에는 문산재 8경이 있다. 이미 앞에서 소개했지만 문산재 8경은 다음과 같다. 

1. 대암(臺巖) 2. 월대(月臺) 3. 석천(石泉)  4. 서루(書樓) 5. 도계(道溪) 6. 죽원(竹院) 7. 서호(西湖)  8. 은산(銀山)
현재 문산재 입구에 있는 약수터는 돌 틈에서 물이 나온다고 해서 예부터 돌샘, 즉 석천(石泉)으로 불려져 왔다. 그런데 안내판에 성천(聖泉)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문산재 8경에 대해서는 여러 선비들이 앞다퉈 시를 읊은 기록이 있고, 여러 편의 차운 시가 남아 있다. 문수서재(후에 문산재가 됨) 건립을 감독한 죽림공 현징의 후손인 현보철도 문산재 8경에 대한 차운(次韻) 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 돌샘인 석천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石泉(석천)
石間瀉出一淸泉(석간사출일청천) 돌 사이에서 솟아나는 한 줄기 맑은 샘  
嗽彼漣漪覺爽然(수피연의각상연) 한 모금 마신 후엔 연의하게 상쾌하네 
混混盈枓流不息(혼혼영두유불식) 솟은 물 국자에 차듯 쉬지 않고 흐르니 
何須拘拘坐觀天(하수구구좌관천) 어느 때나 잡고 싶어 하늘 보며 앉아있네

유학생들은 동굴(책굴)이 아닌 서당의 루에서 공부
한편 현보철은 같은 문산재 8경 차운 시에서 당시 선비들이 어느 공간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는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학생들은 서당의 강당인 누마루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떤 학생, 어떤 선비가 습하고 어두운 동굴에다 책을 쌓아놓고 공부를 했겠는가?  

書樓(서루)
層樓井井又方方(층루정정우방방) 층루는 정정하고 또한 방방 한데 
繞以平湖挾以崗(요이평호협이강) 평지에 호수 끼고 산봉우리 끼었네 
中有讀書好種子(중유독서호종자) 그 가운데서 글을 읽어 제자백가 좋아하여 
羣經萬卷上頭藏(군경만권상두장) 사서삼경 만권 책을 머리 속에 저장했네.

구림지에 소개된 ‘학문의 전당 문산재’
구림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쓴 책, 「호남명촌 구림」(구림지편찬위원회/2006) 150쪽 ~152쪽을 보면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명확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문산재 연혁에 대해서 사실대로 서술한 내용이 나온다. 구림지를 쓴 구림마을 지식인들 역시 문산재를 왕인박사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왜곡된 문산재 안내판은 구림지에 나온 내용으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문산재는 옛 서당으로 유향 구림의 학문의 전당이었다. 문산재와 관련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1766년 4월 20일 최명흥(1690년생, 해주인)이 승사(僧舍)와 문산재의 대들보에 기록한 글을 근거로 쓴 상량문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처음 서당을 연 것은 1657년 정유년이다. 서당은 이전에는 절집 집임서재승사량상에서 시작하여 1668년에 비로소 도유사를 조경찬이 맡아 성기동에 처음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1684년 갑자년에 죽림공 현징(1629~1702)의 책임 하에 구재를 모아 문수암자 터에 고쳐 지었다. 갑자년에 준공된 문산재를 그 후 남쪽으로 옮겨지었다고 현명직(1710~1772)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최호(1787~1862)는 시문에서 경인년(1830년)에 화재로 서재가 소실되어 임진년(1832) 정월에 착공하여 10월 16일 준공했다. 그리고 ‘문수라고 부르게 된 것은 옛날 문수암 터에 서재를 건립했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오랫동안 명성을 떨쳤던 문산재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당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관리 소홀로 퇴락하여 건물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건물을 해체해서 구림중학교에 기증하였으나 요긴하게 쓰이지 못했다. 그 후 왕인박사유적지 조성 과정에서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원위치에 복원하였는데 그 과정이 우리 민족이 운명이나 발자취를 닮은 것 같다. 

문산재에서 공부한 사람 중 큰 인물이 많이 나와 그 명성이 이웃 고을까지 퍼져 서생들이 많이 몰려들어 영암 인근뿐 아니라 해남, 강진 등지에서도 유학 올 정도였다 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시대의 현유 김삼윤 선생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성기동 관음사 터에 최초로 마을 서당인 성기서재를 설치한 태호공 조행립 선생의 이름이 빠져 있어 아쉬운 느낌이 들지만 문산재 연혁에 대해서 명확한 자료를 가지고 잘 설명해 놓고 있다. 

어린이 놀이터였던 월대암과 미륵불(문수상) 옆 자연동굴
필자는 ‘왕인석상으로 변질된 문수상, 제 자리에 돌려줘야’라는 제호로 나간 영암신문 기사를 접한 서울에 거주하는 독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구림마을 동계리 출신으로 성함은 최재갑(87세) 씨인데 약 70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70~80년 전 유소년기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 월대암에 올라 많이 놀았다면서 미륵불 곁에 있는 자연동굴은 꼬마들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최재갑 씨 본인이 어렸을 때는 도선국사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으며 왕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월대암 주변의 석불입상과 바위 동굴이 미륵불, 베틀굴 등으로 불렀던 기억을 들려주면서 이제부터라도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 잡아서 구림마을의 정체성을 제대로 회복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완곡하게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침묵하고 있지만 많은 군민들의 바람이기도 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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