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사에 관심을 가졌을 때 필자가 생각한 가설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에 고대 마한 왕국의 중심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도 이 지역에서 자체 제작한 왕관으로 이 지역 연맹왕국 왕국의 국왕의 왕관으로 보았다. 금동관이 백제왕이 이 지역 ‘수장급 최고 우두머리’에게 준 위세품이라고 본 기존 학설을 정면 비판하였다. 때마침 발굴된 시종 내동리 쌍무덤 출토 금동관 편이 신촌리 9호분과 동형이라는 사실은 필자의 이러한 추론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필자는 시종·반남에 있었던 마한 왕국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54국의 하나인 ‘내비리국’이라고 여겼고, 그 왕국의 중심지를 반남에 있는 자미산성으로 생각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발굴 성과로는 통일신라 이전 백제 시기까지도 산성의 축조 시기를 올려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한 시기의 성곽으로 살필 근거가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최근 필자는 후백제 견훤대왕의 흔적을 찾으려는 전북일보 취재팀과 함께 자미산성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미 본란을 통해 자미산성과 마한과의 관계를 언급한 바 있지만, 자미산성이 영암 마한, 나아가 견훤과 왕건의 치열한 각축의 현장이기 때문에 다시 살펴보려 한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낮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는 자미산은, 해발 95.3m의 북쪽 봉우리(하늘봉)와 98m의 남쪽 봉우리(자미봉)가 남북으로 놓여있는 마안형(馬鞍型)을 이루고 있다. 자미산 동남쪽에 있는 속칭 ‘봉현’과 ‘벌고개’를 사이에 두고 자미산과 연결된 54.9m의 낮은 봉우리 주변에는 고대 마한 왕국을 대변하는 덕산리·신촌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57.6m의 독후산이 자미산과 이어져 있는데 그 북쪽 편으로는 영암 신북면에서 발원한 삼포강이 흐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속칭 ‘석해들’로 불리는 널따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을 관통하는 29.4km의 삼포천은 영암 시종면 남해포에서 영산강 본류와 합류하여 영산강 하구둑이 생기기 이전에는 영산강을 통하여 바다로 연결되고 있다. 자미산을 중심으로 반남, 시종 지역이 서로 마주 보며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마한 남부연맹체의 대국이 마한 문명을 선도하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했던 자미산

자미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반남면 일대는 대부분 표고 10m 내외의 낮은 구릉 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자미산성에서 조망할 때 사방의 시야가 매우 넓다. 북으로는 나주 금성산, 북동쪽으로는 광주 무등산, 남쪽으로는 영암 월출산, 서쪽으로는 무안 승달산, 그리고 영산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혹자는 자미산성이 사방에서 쉽게 눈에 띄어 산성의 입지 조건으로 불리하다고 말하기도 하나, 멀리까지 한눈에 조망되는 이점은 다른 어느 성곽보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점을 지니고 있어 고대 국가가 형성될 때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대부분 산성은 식수원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자미산성 역시 식수원 부족을 약점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목포대 박물관에서 발행한 『자미산성』보고서에도 자미산성에는 식수원이 전혀 없고 산성 내부가 대부분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민들이 입주하여 거주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주군이 발행한 『마을 유래지』에 따르면, 자미산성 안쪽에 있는 신촌리 성내마을에는 산림이 울창하고 식수로 사용할 물이 있어 사람들이 일찍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내용이 있어 식수원이 없다는 보고서와 충돌하고 있다. 

동신대 보고서에서도 우물 1개소를 확인하였지만, 자미산성 북문 밖 30m 지점 계곡 사면부에 있는 ‘용왕샘’이라 부르는 우물은,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자미산과 이어진 선왕산 끝자락 칠성사 바로 아래쪽 샘은 비교적 큰 방죽인데, 자미산 끝자락과 이어지는 선왕산에 칠성사란 절이 있었다. 절터에서는 지금도 옛날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실제 절이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렇듯 자미산성은 식수원도 확보되어 산성의 약점도 극복하고 있다. 게다가 넓은 평야의 중앙에 있어 인적·물적 공급 기반도 넉넉하다. 자미산성 주변을 통과하여 흐르고 있는 삼포천을 이용하면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다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여건도 갖추고 있다. 자미산성은 반남·시종 등 영산강 유역을 아우르는 정치 세력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모두 갖추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여러 정치 세력들이 자미산성을 주목했을 법하다. 자미산과 관련되는 전승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자미산성은 마한의 왕궁터?

자미산이 개국지지(開國之地)였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갑자년에 천황별에서 내려오신 환인께서 죽지 않고 늙지 않는 인류를 만들기 위해 북극 오성 본에 따라 동쪽에 화순 개천산, 남쪽에 영암 월출산, 서쪽에 무안 승달산, 북쪽에 나주 다시 신걸산성을 쌓고, 중앙에 나주 반남면 자미산에 환국을 개천 개국(開天 開國)하셨다.”라 하여 자미산에 환인이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환단고기 자체를 크게 신뢰하지는 않지만, 자미산이 개국지지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사람들이 자미산을 개국지지로 인식할 정도로 지정학적·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도 좋다. 

자미산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나주목조에 보이지 않고 있다. 자미산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곳을 마한 왕국의 왕궁으로 인식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 자미산 이름은 언어학적으로 원래 성을 뜻하는 우리말 ‘잣’과 산을 뜻하는 우리말 ‘메·뫼·미’가 합쳐서 ‘잣뫼’라고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광주광역시의 무등산 자락에 있는 무진고성이 있는 곳을 ‘잣고개’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불린 ‘잣뫼’가 자미산으로 남게 된 것은 민간신앙과 관련이 있다. 자미산의 ‘자미’란 별자리의 이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체 하늘의 별자리들을 삼원과 28수(宿)의 체계로 구분하였는데, 삼원이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이다. 그 가운데 북쪽 하늘의 북극성을 기준으로 그 주위에 운집해 있는 성운 집단이 자미원으로 천제, 태자 등의 별들이 포함되어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자미원이 천제나 신선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었고, 오래전부터 하늘나라 임금이 거처하는 곳은 북극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여겼다. 자미궁은 임금과 왕비, 그리고 태자와 후궁 등이 사는 궁궐이라 한다. 자미산에는 남쪽의 봉우리를 자미봉, 북쪽 봉우리를 하늘봉이라 하는데 모두 민간신앙과 관련이 있다. 

민간에서는 자미산에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 있었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오래전에 자미산에 실제로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까지 거의 800년 이상 영산강 유역을 호령하였던 마한 왕국의 실체를 입증하고 있는 덕산리 고분군·신촌리 고분군·방두고분군·대안리고분군의 중앙에 자미산이 위치하여 이러한 추론의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자미산성은 마한 왕국의 왕궁터라고 보는 것이다. 신라 왕궁인 경주 반월성 둘레가 2.5km인 것을 감안하면 700m 정도 되는 자미산성 둘레는 연맹왕국의 왕궁의 규모로 충분하다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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