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86] ■ 도갑리1구 죽정마을(30)

삼효문 내부 전경
삼효문 내부 전경

선인동 삼효문

월산마을에서 벚꽃 가로수길을 따라 죽정마을로 가다보면 월악동 못미처 오른편 길가에 작은 정려문과 비각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김해김씨 삼효문이다. 정려문 우측에는 김씨 문중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 설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행삼효정려문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395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삼효문은 김해김씨 사군파 양무공 김완 장군의 십세손이신 성린공의 영모각, 정묵공의 실적비각, 사윤공의 삼효각으로 효행 삼효 정려문이다. 고종 24년(1887년)에 성린에게는 증(贈)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명하고 영모각을 하사하셨으며, 차자(次子)인 정묵에게는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증직하여 1920년에 문중에서 실적비각(實蹟碑閣)을 세웠다.

부자가 부모님께 백행지원의 으뜸인 지극한 효행의 징표이며 쌍효자라 하였다.

조카인 상윤은 부모님 병환에 초산어수(樵山漁水)로 약을 구하여 자신의 몸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고 1919년에 고종황제가 승하하시니 조석으로 북향 사배하시면서 단식 통곡하였음에 충과 효의 표상이라 영암향교 유림들이 품의하여 1927년에 성균관에서 효자 포장을 내려 정려문을 세우니 삼효각이라 하였고, 세칭 일문삼효라 하였다.

충효의 업인가! 봄 동백과 백일홍이 삼 년을 피지 않았다고 영암군지 효자 편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호남삼강록 호남누정 김해김씨삼강록 등에 등재되어 있다. 어찌 가문의 영광뿐이랴! 사회의 귀감이로세!

서기 2020년 10월 3일(개천절)
양장 문중 후손 천호(千鎬) 삼가 세우다

김효자 영세불망비음명(전액)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김해 김정묵 실적비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여 교화를 수립하는 것은 국가의 성대한 일이다. 사실을 기록하여 오래도록 누리도록 하는 것은 문중의 친족이 하는 두터운 일이다. 성대한 일이 있고 나서 또 두터운 일이 있으니, 문려를 건립하고 비석을 세워 문장을 새기는 일이 다 그 차례가 있다. 부친이 조부에게 효도하고 아들이 부친에게 효도하며,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랑을 전하였으니, 한 집안에 두 효자가 나오는 것은 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일인데, 김씨 집안에 있으니 의당 그 문중의 친족들이 문려와 비석을 건립하여 그 실제 사적을 표창할 일이다. 돌을 반쯤 장만했을 때, 종질 학현과 종손 재기가 나에게 명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내가 말했다. “두 대의 효행이 깊은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효자에게 동생(董生)의 행동을 하게 하더라도 세상에 반드시 문공 한유의 글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도 조금 늦은 것인가? 바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금 벗에게 부탁하니, 효자의 아름다운 행실과 훌륭한 덕에 하자가 생기는 것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재기가 말하길, “어버이를 버려두고 임금을 제쳐두는 때이니, 이 일은 정말이지 급하여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청컨대 한마디 말로 후세에 보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에 사양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실기(實記)를 살피니 바로 송사 기우만 선생의 글이다. 그 가운데 ‘그의 효행은 8세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상례 치르기를 어른같이 하였다. 19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피를 내어 3일간 약으로 올렸음에도 상을 당하자 예법과 같이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다만 생각건대 효자에게 효자가 있는 것은 하늘이 효자에게 보상하는 것이 도타운 것이다’고 하였다. 선생의 한마디 말로 전모를 알 수 있으니, 함부로 어찌 덧붙이랴?

효는 100가지 행실의 근원이 되니, 부모에게 불효하고서 어찌 군주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 부모를 기쁘게 하고 뜻을 정성스레 함은 그 근원이 되고, 군주에게 충성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은 그 갈래가 된다. 거리낌 없이 갈래를 앞세우고 근원을 제쳐두는 자는 패역하게 되고, 근원을 앞세우고 갈래를 제쳐두는 자는 효충(孝忠)하게 된다. 옛말에 충신을 구하는 것은 효자의 문중에서 한다고 이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 가운데 누가 어버이가 없겠는가마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바꿀 수 없다. 사람에게 누가 자식이 없겠는가마는 효자는 더욱 어렵다. 오직 김씨의 효성은 아버지의 효와 자식의 효가 훌륭하게 서로 이어졌으니, 칭찬할만하거니와 문중 친족들의 돈독함이 더욱 가상하다. 이어서 명을 이어붙이니,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월악은 높고 높으며, 서호는 넓고 
넓도다.
산악이 무너지지 않고 호수는 흔들리지 
않으니,
효자의 이름이란 함께 가는 것이다.

상장군탄(上章涒灘) 3월 초 길일, 월성 최기성 짓고, 이천 서용신 씀
호역(戶役) 전주 최치균 

<출처:영암의 금석문 227쪽/영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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