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84]
■ 도갑리1구 죽정마을(28) - 문산재 문수상(文殊像)(2)

옛 문수암 터에 자리한 문수상
옛 문수암 터에 자리한 문수상

문수신앙의 발원지, 월출산

「동국여지승람」에는 월출산을 일러 ‘본국 밖(국외)에서는 화개산(華蓋山)이라 칭한다’는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국외(國外)’는 중국을 뜻한다. 화개산과 월출산 명칭에 대해서는 1663년에 간행된 「영암지도갑사사적」에 언급되어 있다. ‘옛날 문수대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구름이 항상 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서 화개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월출산」은 달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옛날에 지혜와 용맹을 주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는 문수대사가 월지국에서 나와 이곳(월출산)에 살았으므로 월출산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월대암 아래 문수상과 자연동굴을 왕인석상과 책굴로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
월대암 아래 문수상과 자연동굴을 왕인석상과 책굴로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

도갑사 해탈문에는 기사문수동자상이 봉안되어 있고, 대웅보전 편액 위에도 문수동자가 청사자를 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는 월출산이 예부터 문수신앙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한편, 1972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왕인박사 행적을 찾아 영암 구림마을에 온 김창수 씨도 문산재와 미륵불을 답사하고 「박사왕인」(저자 김창수)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관련 기록을 남겼다. 본문 215쪽~216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문산재의 전신은 문수암이라 불리었다. 월출산 서남단 죽순봉 밑의 인적도 드문 산 중턱 심곡에 송수죽밀(松秀竹密)하여 적막한 곳에 정결한 기와집 한 채가 있는데 이것이 문수암(文殊庵)이다. 경내는 약 2백평 되는데 석책대가 있고 앞에는 석탑대·주춧돌·발굴된 백제 때 와당(瓦當)·신단대(神壇臺) 등이 있으며 이조(李朝) 도기 파편도 있고 그 옆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암자 뒤에는 장(丈)(약 3m)이 넘는 미륵불이 서 있다.

백제 초기 때 월나국(지금의 인도)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중국 남방을 돌아서 조선으로 건너와 월출산의 기승(奇勝)에 탄복하고 주룡포에 배를 댄 후 여기에다 문수암을 창건하여 불도(佛道)를 널리 포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산재 미륵불의 전설

1975년에 출간된 「박사왕인」(저자 김창수) 본문에 문산재 미륵불에 대한 두 가지 전설이 나온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륵불이 서 있은 지 너무나 오래되어 우연히 넘어져 흙에 묻혔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년 전(1800년대 후반)에 당시 낭주골 군수 이규현의 꿈에 현명하기를 『문산재 왕인책굴정문 앞에 묻힌 지가 오래되어 무척 고생스러우니 군수 그대가 광명을 보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규현 군수는 이상히 여겨 군민을 동원하여 흙을 파헤쳐보니 과연 미륵불이 묻혀 있었다. 군수는 크게 놀라 공손하게 모셔서 불각(佛閣)을 건립하고 준공식까지 성대히 거행하였더니 불각이 갑자기 무너지고 말았다. 괴이하게 여기던 터에 바로 그날 밤 다시 현몽하기를 『내가 이제까지 흙에 묻혀 있다가 광명을 찾았거늘 약간의 풍우쯤이야 염려할 것 없도다. 그대로 지내면 좋은 때가 올 것이니 기다릴 지어다』고 하였기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년 전(1700년대 후반)이다. 덕진면 강정마을 출신 김권(金權)이 문산재에서 수학할 때 결심한 바 있어 매일같이 미륵불에게 공양을 올리고 지성으로 공을 드렸다. 하루는 평소와 같이 공을 공손히 드리는데 미륵불이 별안간 말을 한다. 『그대의 정성이 이다지도 지극하니 고맙도다. 비번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곳에서 출제될 것이니 더욱 열심히 공부할지어다』 하였기에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연 미륵불이 말한 그대로였다.”

(출처: 본문 229쪽 ~ 230쪽)

여기에서 ‘왕인책굴정문’이라는 말은 새롭게 지어낸 말로 보인다. 그가 말한 ‘왕인책굴’이라는 동굴은 마을주민들이 난리를 피해 피신하던 자연 동굴에 불과하다. 동네 주민들은 ‘베틀굴’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1800년대 후반 영암고을에 ‘왕인’이라는 이름은 회자된 적도 없고 어느 문서에 기록된 흔적도 없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저렇게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다 책을 쌓아두고 공부할 학자나 선비는 없을 것이다. 책은 습기에 약해 조금만 물기를 머금어도 금방 축축해지고 곰팡이가 피기 때문이다.

김창수 씨는 같은 책 223쪽에 함께 답사하는 일행 중 누군가가 ‘자고이래로 후학자들이 이 미륵불전에 향화(香火)(향불)을 올리고 발원을 하여 크게 성공한 전설이 많다’고 한 말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처음부터 문수신앙과 문수암, 그리고 미륵불에 대해서 지역주민들에게 전승되어 오던 전설과 풍속을 전해 듣고 잘 알고 있었다. 

문수상 이름을 돌려줘야

월출산이 문수신앙의 발원지고 문수사가 창건되어 번창했었으며, 도갑사 해탈문에 문수동자상이 봉안되어 있고, 월대암 아래 문수암 뒤편에는 문수상이 세워져 있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들어와 월대암 문수상이 ‘왕인석상’으로 갑자기 명명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왕인박사의 행적을 열심히 조사하던 김창수 씨가 1972년과 1973년에 구림마을을 답사하여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몇몇 주민들의 말을 듣고 고증할만한 명확한 자료나 유물 유적도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구림마을 성기동과 문산재를 왕인박사 유적지라고 확정지어 언론과 학계에 발표한 탓이 크리라 사료된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문수암이 있던 곳에 문수상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수백 년 동안 마을주민들에게 알려져 온 내용이다. 문수상 곁에 있는 동굴도 그냥 자연 동굴일 뿐이고 주민들이 비상시에 피신했던 동굴일 뿐이다. 주민들도 모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왕인박사를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고자 하는 열망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불교 유물이 명백한 문수상을 아무 상관도 없는 ‘왕인석상’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무리인 것 같다. 베틀굴로 알려진 자연동굴을 ‘책굴’로 둔갑시키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영암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하고 정직한 태도를 견지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려놓을 차례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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