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죽정마을을 떠나 구림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옛사람들은 죽정을 ‘웃사우’, 신흥동을 ‘아랫사우’라고 했으니 사실상, 이곳 죽정마을도 크게 보면 구림마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기동에 있던 구림마을 서당(성기서재)을 죽정마을 뒷산 문수암터로 이건하여 문수서재(문산재)를 설립한 것만 봐도 죽정마을은 구림마을과 한 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림마을 사람들이 직접 쓴 책 「호남명촌 구림」에도 “옛날에는 열다섯 동네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보통 구림 열두 동네라고 불린다. 지금은 동구림, 서구림, 도갑리를 구림이라 한다.”고 나와 있다.(16쪽) 구림마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을까?
 
선사시대와 삼한시대의 구림

구림마을 역시 여러 기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고인돌은 비파형동검과 함께 청동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까지 구석기 유물이나 신석기 유물은 영암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곧 철기시대가 도래했고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이 들어섰으며, 영암은 마한에 속한 지역이다. 「호남명촌 구림」(구림지편찬위원회/2006) 역시 마한에 대한 이야기로 책의 서막을 연다. 

“구림마을은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암군 군서면에 속하고 국립공원 월출산 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영암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馬韓)의 땅이었고, 369년(백제 근초고왕 14년)경에 백제에 복속되어 월나군으로 불리었으나 758년(통일신라 경덕왕 17년)에 영암군으로 바뀌었다.(14쪽) ... 마한에는 54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는데 큰 것은 10만호, 적은 것은 수천에서 수 백호를 거느렸다. 가장 세력이 강한 목지국(目支國)이 여러 부족국가를 지배했다고 한다. 구림 주변 일대는 목지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8쪽)”

하지만 위의 내용은 근거가 없다. 삼국을 기록한 대표적인 역사서인 「삼국사기」(김부식)와 「삼국유사」(일연)에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마한을 복속시켰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 신공 49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복설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연대까지 바꿔가며 억지로 꿰어맞춘 조작의 결과물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심각하게 왜곡 당했는데 그 중심에 「일본서기」가 있다. ‘왕인’과 ‘아직기’에 관한 이야기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만 나오고 우리나라 문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가야사 왜곡’과 ‘전라도 천년사’ 왜곡 역시 「일본서기」의 신공 49조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100년 전부터 일본의 역사 왜곡 숙주 역할을 톡톡히 해온 「일본서기」가 도대체 어떤 책인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영암이 크게 내세우고 있는 ‘마한’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일부 사학자들 가운데 왕인박사가 백제 사람이 아닌 마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된 역사서인데 누가 썼는지 편찬자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책이다.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부식, <삼국유사>의 저자는 일연스님, 이렇게 편찬자가 명확하게 나와 있는 우리나라 역사서와 비교된다. <일본서기>는 서기 전 660년에 야마토왜가 시작했고, 신공왕후가 신공 9년(209)과 신공 49년(249)에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를 점령하여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삼았다고 써놓았다. 반면에 <고사기>는 편찬자가 나온다. 712년에 ‘태안만려’라는 사람이 편찬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사기>에는 신공왕후가 삼한을 정복하고 남부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고사기>에는 안 나오는 내용이 불과 8년 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부터가 황당하다. 게다가 두 역사서에 나오는 1대부터 7대 일왕의 수명이 서로 맞지 않는다. 137세 수명도 황당하지만, 8년 차이를 두고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 내용이 이렇게 심한 차이가 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국 왕들의 생몰연대와 제위 기간은 거의 일치한다. 일본인들 스스로도 연대 조작이 민망했던지 위의 사실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일본사 사전인 <일본사대사전>(평범사)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무(1대) 즉위를 서기 전 660년으로 설정해 초기 천황들이 부자연스럽게 장수하고, 신공황후기는 <위지 왜인전>의 비미호(卑彌呼)고 생각되지만 120년 정도 연대를 끌어올렸다.” 

야마토왜 정권 성립 시기를 서기 4세기 이후로 잡더라도 일본서기는 1대 신무왕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설정하여 천 년을 앞당겨 조작한 셈이다. 120년 정도 연대를 끌어올리는 것도 <삼국사기>의 내용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역대 왕들의 제위 기간도 맞지 않고, 연대도 자기들 맘대로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을 과연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한한 역사서다. 

<일본서기> 신공 9년(209) 삼한정벌 기사 

「신공왕후가 재위 9년 겨울 신라정벌에 나섰다. 겨울 10월 신공왕후가 직접 신라 정벌에 나섰는데 야마토왜군이 나타나자 신라왕은 “내가 듣기에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한다. 또한 성왕(聖王)이 계시는데, 천황이라고 한다. 이는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들어 저지하겠는가”라며 스스로 항복하면서 조공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이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일본국에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살펴보니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영외에서부터 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정성을 다해서 “지금 이후로 영원히 서번(西蕃)(서쪽 울타리)이라고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서 내관가의 둔창(屯倉)으로 정했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이라는 것이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일본서기/ 신공(神功) 9년>

일본(日本) 국호는 670년 사용

일본서기 신공 9년 기사에 나오는 ‘일본’이란 명칭은 서기 670년에 비로소 나오는 이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 이름하였다.’라고 했다. 이때 신라가 이름 변경을 인정해서 그 뒤로 일본과 주고받는 외교사신 관련 기록에서도 왜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이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현재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보다 빠른 461년 전에 이미 ‘일본’이라는 국호가 신공 9년(209) 기사에 등장한다. 왜(倭)의 사학자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리 미래세계를 엿보는 능력을 가졌던 것 같다. 이런 탓에 <일본서기>는 조작이 심한 책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신공황후의 기사는 이후로도 계속된다. 신공황후는 40년 후인 신공 49년(249)에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 이때 가야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지금 역사 왜곡 논란으로 위기에 처한 <전라도 천년사>와 앞으로 우리 영암이 직면할 <마한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앞으로 답사할 구림마을의 역사와 문화도 여기에서 비껴갈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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