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돌려 잠시 월산사를 찾다

도선국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월곡리 월산사 전경. 월출산 노적봉을 배경으로 대웅전 용마루가 힘차게 뻗어있다.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도선국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월곡리 월산사 전경. 월출산 노적봉을 배경으로 대웅전 용마루가 힘차게 뻗어있다.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죽정마을 30회를 끝으로 도갑리 연재를 마치고 구림마을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던 차에 한 독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월산마을에 거주하는 박창진(96) 씨라는 분으로 월산사와 관련해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약속된 시간에 월산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월산사를 지키고 있는 혜심 스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

도선국사 입문지입석이 있던 곳

혜심 스님이 향기가 은은하고 그윽한 목련꽃차를 내주며 월산사 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30여 년 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도선국사입문지라고 음각된 오래된 입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입석이 사라져버리고 대신에 누군가가 도선국사낙발지라는 글씨를 바위 위에 새겨놓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곳 전체가 대숲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이렇게 큰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 대웅전을 새로 지으셨는데 현재의 절터는 누가 잡으셨는지요?

법륜스님이 참선 중에 이 터를 계시받았다고 합니다. 34세 나이로 조계종으로 출가하셨다가 30여 년 전에 이곳에 와서 토굴에서 수도 정진하셨지요. 월출산 8부 능선에 있는 바위에서 주로 참선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4년 전에 71세로 입적하셨습니다. 법륜스님 입적 후에 제가 신도들과 함께 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도선국사낙발지라고 음각된 바위가 있는 곳에 저도 가봤습니다. 바로 아래쪽에 있는데 주춧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더군요. 월암사지로 전해져온 곳입니다.

영암군에서 2000년대 들어와 세 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월산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다량 확인이 되어 월산사지로 변경되었습니다.”

혜심스님은 2015년도에 발행된 영암 월출산 월산사지 3차 발굴조사 보고서라는 책자를 참고하라고 가져다주었다.

월산사는 왕실의 원찰

영암군과 대한매장문화연구원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의 출가지로 알려져 있는 월곡리 월암사에 대해 2004년과 2009, 그리고 2013년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과정에서 月山寺라는 사찰명이 명문 기와에서 다량 확인되었고 그 결과 종래 영암 월암사지로 보고되었던 터가 영암 월산사지로 변경됐다.

3차 발굴조사(2013812일부터 92)에서는 '월산군·수빈궁'(月山君 粹賓宮 1470년 이전), '월산대군·인수대비'(月山大君 仁粹王妃 1471년 이후) 등의 왕실 후원자 이름을 새긴 기와가 확인됐다. 이와 함께 '정유'(丁酉.1477)·'성화 17'(成化十七年.1481)·'을유'(乙卯.1495) 등 연호와 간지를 새긴 기와가 나왔으며, '내섬'(內蟾)을 비롯한 왕실 관련 관청 이름을 새긴 분청사기도 출토됐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이자 성종의 형

월산사 신도회장인 박창진 옹은 월산대군이 한양에서 천 리나 떨어진 영암으로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월산군은 세조의 장손이다. 아버지가 의경세자인데 일찍 죽는 바람에 삼촌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예종이다. 하지만 예종도 빨리 죽는 바람에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한명회의 농간과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뜻으로 그러지 못했고, 결국 동생인 성종(成宗)이 조선의 제9대 왕위에 올랐다. 동생이 왕이 되면 주변에서 마땅히 형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월산군은 생명을 보존하고자 이곳 영암 월출산 자락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옛날에는 월산 느티나무 아래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구전에 의하면 어머니 인수대비가 큰아들인 월산군을 데리고 느티나무 아래 배를 댔다고 한다. 월산군은 이곳 월산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지냈다고 한다.”

구림촌에 속했던 월곡리 일원

한편 월산사 혜심스님이 보여준 발굴 보고서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월산사지가 위치한 군서면 월곡리 일원은 구림촌(鳩林村)으로 명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희(1808~1873)가 정묘년(1843) 3월에 서문을 쓴 선원속보(璿源續譜):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고()2518-96-29)에는 구림촌지를 인용하여 작성한 다음과 같은 문구가 확인된다.

大君出遊全羅道時 多留靈巖鳩林村云 按寺瓦碌皆書 月山 尙今流傳 而村民若見 大君子孫必厚禮侍之云대군이 전라도 출유하였을 때 영암 구림촌에서 많은 날을 머물렀다고 한다. 살피건데, 사찰이 기와나 벽돌에 모두 월산(月山)이라 글씨가 있고 지금까지도 전해져서 촌민들도 뚜렷이 보았다고 한다.

대군 자손들은 반드시 두텁게 예를 갖춰 대했다고 한다.

’ (
출처: 영암 월출산 월산사지 3차 발굴조사 보고서 109/ 원문해석: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옛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구림마을의 영역이 월산사가 위치한 월곡리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