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서 선거제도는 매우 좋은 제도이나 선거하는 선거권자들의 훌륭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칫하면 전체적 발전은 뒷전이고 눈앞에 나의 만족 욕심에만 보이기 쉽다. 나의 앞이 놓인 복주머니에만 만지작거리며 찍다가는 이 사회의 평형감각은 사라지고 만다. 득표수에만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불나방에 속아서 찍었다가는 사회가 평형감각을 잃고 어지럼증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결국은 세월호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가 발전하면서 매년 커다란 선거를 치른다. 금년에는 조합장 선거로 벌써부터 후끈 달아오른 모습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래의 영암을 생각하며 큰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이번에 뽑히는 조합장들은 영암미래의 실물경제에 커다란 영향권에 있는 경제지도자이기 때문이다.당신은
지난 1월 31일, 재무부 장관과 신한·외환은행장을 역임한 이용만 회장님과 오찬을 함께 하였다. 우리나라 재정금융의 산역사라 일컬어지는 회장님은 후배가 사장으로 있는 모 신탁회사의 88세 현역이시다.재무부 이재국 근무시절 봄철만 되면 농협회장이 발이 닳도록 찾아와 농사자금 대출재원 증액을 요청하곤 했는데, 가을 수매기 때 회수하지 못해 상환이 늦어져 국가재정 운용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하시며 농협이 크게 성장하여 오늘날 금융, 보험, 유통업계를 선도하고 있는데 대하여 치하와 함께 그것은 농협 임직원들의 사명감과 농심의 결과라고 말씀해주셨다.17세에 혈혈단신 월남하여 살아온 인생역정을 지난 연말부터 1월까지 모 일간지에 연재하였는데, 그 내용을 스크랩한 책을 주시기에 받아 밤새워 읽었다. 공직자로
“내숙아! 올해에는 복 많이 받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세뱃돈을 주시면서 하신 덕담이 지금도 귀전에 생생합니다. 내숙(來淑)은 내 아명이었습니다. 이웃마을의 벼슬이 높고 부자로 살았던 사람의 이름을 고모할머니가 붙어주셨다고 합니다. 그의 운을 닮으라는 염원에서 지어 주셨던 같습니다. 그러나 이름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어서 ‘왜 하필이면 여자들 이름으로 지어 주셨을까?’ 하고 불평을 하였습니다.그런데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손수건과 함께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는 ’신중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이었지만 계급장이라도 단 듯이 기뻤습니다.성년이 된 후 족보에서 내 이름을 찾아보았습니다. 집안에 내려오는 33세손 항렬은『宰』이고,
며칠 후면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입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세배 올립니다.‘황금 돼지해’라는 올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농사도 우순풍조하여 돈 많이 버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라옵고, 식견과 경륜도 부족하고 글 재주도 없는 저에게 귀한 지면을 할애해주신 영암신문 관계자 분께도 더욱 성과 있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며칠 전 시간을 내어 해외에 다녀왔습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공항을 가득채운 모습을 보며 잘 사는 우리나라가 실감이 났습니다. 지금부터 130년 전 1888년에 연세대학을 설립하신 피터 언더우드 가족이 제물포(지금의 인천)항에 도착하여 제1성으로 ‘버섯밭과 같은 작은 동네’라고 묘사한 글을 읽었는데, 마천루로 가득 찬 그 지역을 바라보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자시는 창 밧괴 심거 두고 보쇼서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 소셔함경도 홍원 출신의 여류 시인이자 경성 관아의 기생 홍랑(洪娘)이 한양으로 떠나가는 최경창에 보낸 연정가(戀情歌)이다. 최경창은 병마절도사의 부관인 정6품 북도평사(北道評事)로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던 도중 홍원에서 홍랑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을 시작했다. 최경창이 이듬해 한양으로 돌아가자 홍랑은 함관령(咸關嶺)까지 따라가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조선에는 ‘양계지금(兩界之禁)’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백성들은 한양도성 출입이 제한됐고 관기(官妓)는 해당 관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홍랑은 최경창이 한양으로 돌아가서 병으로 몸져누웠다는 풍문을 듣고 한양까지 올라가서 간병을 하였다.말없
우리는 어떤 영암 사람들인가? 영암이라는 지역 공동체가 훌륭해지려면 영암이 살아가는 영암사람이 훌륭해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따라서 영암사람 각자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가 훌륭해질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어떤 능력이 출중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모든 영암사람에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하리라고 믿는 것은 헛된 꿈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혼자 힘으로 영암사람 전부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복한 영암으로 만든 것은 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영암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권자인 영암사람들은 우리가 뽑은 능력자가 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잘하면 박수치며 함께 힘을 보태야 한다.그렇지 못하면 직언으로 바르게 가도록 채찍질을 해야 한다. 영암사람으로 100% 만족
기해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면으로나마 ‘낭주골’에서 인사 올립니다. 금년 한 해도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에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한국전쟁이 휘몰아쳐 나라가 매우 혼란하고 초근목피로 겨우 삶을 영위하던 가난했을 때의 일이라서 기억하기조차 싫습니다만 그런 삶을 통해서도 얻은 교훈이 있어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살았던 노송리 마을은 신가(慎家)들의 집성촌입니다. 타성 몇 집을 빼고는 모두가 친척인 셈입니다. 필자가 나고 자란 앞집에는 마을 이장 일을 맡아 보았던 부잣집 아제가 살았습니다. 울타리 하나 사이로 개구멍을 뚫어서 다니니 한 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아제는 과자 사오는 심부름을 필자에게 자주 시키곤 했습니다. 그 대가로 달콤한 과자를 하나씩 얻어먹었습니다.그
벌써 숨 가쁜 섣달의 끝자락이다. 묵은 것 정리하고 새 해맞이 채비를 할 때다. 숲들은 마지막 잎을 다 털어서 아주 말쑥해졌다.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말간 산들이 한 걸음 다가서 보이며 바위는 마른 이끼를 입은 채 겨울 숨결에 오소소 떨고 있는 것만 같다.혹렬한 겨울의 손인 추운 바람은 더욱 자주 문을 흔들고 숲을 뒤설레며 고함을 지르고 난폭해질 것이다. 그럴 때면 눈보라도 법석을 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지와 그 삶의 숨결에서는 아득히 시간의 속삭임과 영겁을 들을 수 있다.내일이 동지이다. 이제부터 겨울이 한층 본격화 할 것이란 신호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뭇 생명에 대하여 자연이 일대 반격전을 벌인다.4세기 전의 어느 시인은 ‘주여! 겨울과 재난과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참으로 어렵고 부담스런 일이라고 고백한다. 40여 년 전 초임 공직자 시절 필자의 과장이었던 S대 법대 출신으로 고시에 합격하여 중앙청에서 근무하던 세상말로 참으로 잘 나가던 그 분의 고백이 귓가에 쟁쟁하고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공부하는 일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고 글을 쓰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이라고...필자는 피를 토하거나 뼈를 깎는 일을 당해 보지 않았기에 그 심정과 고통을 실증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힘들고 부담스런 일일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처럼 힘들고 부담스런 글 쓰는 일을 지난 11회에 걸쳐 느꼈던 것 같다. 정말 엄살이 아니다.지난해 연말 영암신문 ‘낭주골’ 필진 요청을 받았을 때 한사코 거절했지만 이런 저런 사유를 들어 설득하는 경영진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 벌
교직 20년이 되던 해였다. 시골에서 10년을 근무하다 광주로 전입했다. 광주로 전입하기가 매우 힘든 시절이었다. 같은 해에 들어온 친구 교사 네 명과 유독 친하게 지냈는데 나이가 엇비슷했고 뜻하는 바가 같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력 15년차라 모임에서의 대화는 주로 승진이야기였다. 그 친구들은 벽지에서 고생을 하고 전입했기 때문에 승진의 길이 쉬었다. 그러나 나는 승진을 크게 좌우하는 벽지점수가 없어서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 친구들과 자주 만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가슴앓이를 했다. ‘나도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든지 승진을 하겠다고’ 모임에 다녀와서 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꿈을 이루기 위해서 책보는 시간을 늘리고, 글쓰는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여 년 동안을 준
세한도(歲寒圖)는 조선후기의 학자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에 위리안치 유배된 지 5년째 되는 해에 그린 그림이다. 한 겨울 엄동설한에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하였다. 세한도는 전문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선비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그러나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초라한 집 한 채와 고목 몇 그루가 한 겨울 추위 속에 떨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유배가기 전이나 유배간 뒤나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김정희는 문득 논어 자한(子罕)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약 2년간 근무했다. 2년간 모두 고2 담임을 했다. 1969년도 모 고등학교 재직 시의 일이다.나의 학급 종례는 이채를 띠었다. 놀이가 있는 종례였다. 매일이 그런 것은 아니고 학번의 짝수·홀수로 나누어 팔씨름도 하고, 닭싸움도 했다. 운동장에 나가 2인3각 릴레이도 했다. 놀이에서 이긴 쪽은 그냥 귀가를 하고, 진 팀이 청소를 했다. 청소를 재미있게 하는 것이 큰 효과였다.‘다음에는 이기자’며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를 했다.중간고사나 월말고사가 끝나면 성적순으로 20등까지 남고 21등부터는 귀가하도록 했다. 내 경험으로는 성적이 낮은 사람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반대였다. 성적이 좋은 사람이 남아서 청소를 하고 성적이 낮은 사람은 어서 가서 공부를 하라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아 왔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신통한 답을 할 수도 듣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70여 평생 살아오면서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꿈을 이루었노라고 시원하게 답할 수 있을까...?이런 일 저런 직책 많이 해보고 겪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 그 원인은 무엇일까. 지금 되돌아보면 목표설정과 시간관리가 아쉬웠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비단 필자만의 고백일까. 아쉬움과 후회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 분들과 살아갈 날들이 많은 후배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고 이 글을 쓴다.“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흐른다. 돈보다 시간을 아껴라”라고 하면서도 과연 시간에 대하여 어떻게 관리하며 살고 있는가.시간은 과연 무엇일까? 시간을 알아야 관리하는데 도움이
2016년 12월 17일, 한국전쟁희생자 영암군합동위령제를 모셨다. 제사 끝 무렵 희생자들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에 대한 안내를 했다. 그리고 2017년 1월부터 매주 토요일, 상담 요청이 있는 마을을 돌며 200여 분의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68년 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한국전쟁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접했다.처음 방문한 곳은 학산면의 어느 마을이었다. 노인 두 분이 우리를 맞았다. Y노인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울먹였다.“나는 당시 열한 살로 마을 앞에서 친구와 놀고 있었는데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타나 증조할머니부터 식구 열여덟 분을 묶어 산 밑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키면 나도 잡혀갈 것 같아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숨었습니다. 부모님도 모두 잡혀가 식구는 한 사람도
인생은 어떤 대상과의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는다. 또한 우리는 독서나 여행 등을 통한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사마천의 ‘사기’는 내 인생에서 깊은 울림을 준 책이다. 두 책은 처음 접했을 때와 그 이후 한 번씩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성찰의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나치 독일에게 자신의 조국 프랑스가 침략 당하고, 인류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 왜 ‘어린왕자’를 썼던 것일까? 그가 세상물정
지난달에 나는 이 낭주골에서 ‘대중가요 가사 유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다른 달에 비해서 반응이 더 좋았다. 틀린 줄도 모르고 마구 노래를 불렀다며 유익한 지적이었다는 평이었다. 내친김에 지난달에 이어 이 달에도 틀린 줄도 모르고 함부로 쓰고 있는 생활 속의 우리 말 몇 가지를 들춰보고자 한다.지금 벼 수확이 한창이다. 지난 여름은 견디기 어려운 폭서였지만 ‘쌀농사’는 풍년이란다. 쌀농사-신문이나 방송에서도 태연히 쓰고 있다. 그러나 바른말은 '벼농사'이다. 수도작의 도(稻)는 ‘벼 도’이다. 벼농사를 해서 수확한 벼를 도정해야 ‘쌀’이 된다. 밭에 배추씨를 심었으면 ‘배추농사’이지 ‘김치농사’는 아니다. 관행적으로 ‘쌀농사’로 일관하지 말고 '벼농사'로 써야 한다. 벼를 수매할 때 ‘쌀’
“祖國 近代化”읽고 듣기만 해도 가슴 어딘가를 아리게 하는 표현이다.필자 70대를 넘겼기에 조국 근대화 시절을 체감했고 그 분위기를 피부로 느껴왔기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지긋 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선진화된 국가건설을 위해 국가적으로 시행되었던 국민운동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운동을 함께하면서 참아야 했고 견뎌내야 했으며 희생을 전제로 일정부분 양보해야만 했었다.폐타이어를 태워 연료로 활용해도 그리고 자동차 배기가스 정도의 오염은 견디어야 애국시민이었다. 폐기물로 썩어가는 중소하천의 오염 때문에 고기떼가 죽어가도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얼굴을 돌렸던 시절이었다. 격동기를 거쳐 경제성장과 자원 재활용 등 효율성을 높였다고 성과를 내세우기도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가문 신비(慎妃, 慎씨의 본관은 거창, 덕진면 노송리에 집성촌)의 전설입니다.조선 10대왕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가 흘린 피로 인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킵니다.또 다른 폐륜 중 하나는 전국에서 미인들을 뽑아 ‘흥청’이라 이름붙인 기생, 장녹수를 비롯해 극해 달하는 ‘흥청망청’ 향락으로 날을 삼으니 정사(政事)는 딴전이었고,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말리는 충신 하나 없었고 간신배들은 오히려 그의 방탕을 부추겨 당리당략에 혈안이 되었다니, 이런 연산군의 폐륜을 보다 못한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정 등과 거사일을 정하고, 거사 전야 좌의정 신수근(慎守勤)을 찾아 그의 마음을 떠 보니, “매부를 패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에 동조할 수 없소.”하며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노와 갈등의 근본원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자기와는 다른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적 태도가 필요하다. 나아가 사회구성원 사이에도 나와 다른 의견과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가 절실하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회단체나 정치단체 사이에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서로가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본적 태도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나라나 민족의 차이나 문명과 종교, 인종의 차이에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만백성 모두가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해 누구나 자신의 뜻을 쉽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한 것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뜻이다. 한글은 외우기 쉽고, 우리말을 들리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어 의사소통이 쉽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오늘 날 우리가 컴퓨터나 핸드폰을 수월하고 용이하게 쓸 수 있는 것에서 한글의 위대함을 크게 느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공기와 빛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듯 한글이나 한국어의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마냥 안타깝다.사람들이 식품에 불량품이 섞였다거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건이 나타나면 야단법석이다. 유행병이 퍼지면 모두가 긴장하고 근심한다. 그러나 잘못 쓰거나 틀린 우리 말(글)에 대해서는 무관심 또는 무감각하고 있다. 무엇이 왜 틀린지를 모르기에 그러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