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경 천 구림서 낳고 영보에서 자람 전 KBS광주총국 아나운서 부장 전 호남대학교 초빙교수 국제로타리3710지구 사무총장

벌써 숨 가쁜 섣달의 끝자락이다. 묵은 것 정리하고 새 해맞이 채비를 할 때다. 숲들은 마지막 잎을 다 털어서 아주 말쑥해졌다.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말간 산들이 한 걸음 다가서 보이며 바위는 마른 이끼를 입은 채 겨울 숨결에 오소소 떨고 있는 것만 같다.

혹렬한 겨울의 손인 추운 바람은 더욱 자주 문을 흔들고 숲을 뒤설레며 고함을 지르고 난폭해질 것이다. 그럴 때면 눈보라도 법석을 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지와 그 삶의 숨결에서는 아득히 시간의 속삭임과 영겁을 들을 수 있다.

내일이 동지이다. 이제부터 겨울이 한층 본격화 할 것이란 신호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뭇 생명에 대하여 자연이 일대 반격전을 벌인다.

4세기 전의 어느 시인은 ‘주여! 겨울과 재난과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하고 기원했다. 셰익스피어도 ‘겨울에는 슬픈 얘기가 제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제임즈 톰슨은 ‘죽음처럼 잔인하고, 묘지처럼 굶주린 것이 겨울’이라고 읊었다. 이런 본격적인 겨울의 문턱이 동지인 것이다.

그러나 동지는 다만 암흑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광명과 희망의 소생을 상징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동짓날을 아세라 했다. 다음해가 되는 날이란 뜻이었다. 이 날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팥죽을 쑤어 나눠 먹고 또 팥죽 국물을 문짝이나 벽에 뿌렸다.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는다는 뜻에서였다. 이런 풍습은 이제 쉽게 찾을 길이 없어졌다. 희망과 광명의 소생을 찾다가 지쳐 버린 때문일까.

당나라 때의 유명한 이야기 하나. 무억(武億)이란 사람이 있었다. 무억이 각지를 방랑하다가 섣달 그믐날에 시골 어느 친구 집에 묵게 되었다. 진객(珍客)의 객고를 풀어주고자 주인은 그의 소원을 물었다. 무억은 그냥 술이나 실컷 마시고 싶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멋진 주안상을 차려 내왔다. 어느 새 무억의 눈에는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슴츠레해진 무억에게 다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무억은 그저 마음껏 울게 내버려 달라고 말하기가 바쁘게 마구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묵은 해가 저물어 간다. 그 모든 희망도, 꿈도, 회한도 이제는 영겁의 어둠 속으로 파묻혀 갈 것이다.

올해도 벌써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꼭 술에 취한 무억이 아니라도 이를 데 없는 허탈과 고독의 쓰라림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지 않을까. 이것이 캘린더의 마지막 남은 한 장을 찢어 버릴 때의 감상이 아닐까.

세밑 재야가 되면 어디선가 제야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올 것이다. 그것이 구슬프게만 들리는 것은 주책없이 또 한 살을 먹게 됐다는 느낌에선지, 또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틋한 감회 때문은 아닌지.

제야(除夜)란 모든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밤이라는 뜻. 옛날 궁중에서는 나의(儺儀)라 하여 역귀를 쫓는 굿을 하고, 가면백희(假面百戲)를 크게 벌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섣달 그믐날의 긴 밤이 지나면 벽사(辟邪)와 액을 내쫓기 위하여 세화(歲畫)와 문배(門排)를 거는 것이다.

이제 곧 새로운 희망과 기쁨과 사랑을 안고 또 다른 태양이 찬란하게 솟아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 새 세월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온갖 아쉬움과 서글픔을 안고 저물어가는 이 한해를 곱게 전송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저물어 가는 한 해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를 조용히 가려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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