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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과 속물성 사이에서
김 정 호

신북면 행정리生
법무법인 이우스 대표변호사
민변 광주전남지부 지부장
전라남도 행정심판위원ㆍ소청심사위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인생은 어떤 대상과의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는다. 또한 우리는 독서나 여행 등을 통한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사마천의 ‘사기’는 내 인생에서 깊은 울림을 준  책이다. 두 책은 처음 접했을 때와 그 이후 한 번씩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성찰의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나치 독일에게 자신의 조국 프랑스가 침략 당하고, 인류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 왜 ‘어린왕자’를 썼던 것일까? 그가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순수성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서 방황하고 고뇌했던 작가가 가장 순수한 영혼의 상징인 어린왕자를 통해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현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읽을수록 기원전에 쓰인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과 인간관계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녹슬지 않은 현대성과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는 반대로 해석하면 2천년 전인 기원전이나 2천년이 흐른 현재나 기술과 문명의 이기가 아무리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기심과 본성은 변함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진정성과 속물성 사이에서’라는 주제의 칼럼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어린왕자’와 ‘사기’에서 발원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옮겨온 것이어서 전혀 새롭거나 필자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고 고전의 주제의식을 차용한 결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성현들이 고전을 통해 후세에 전해주고 있는 삶과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들은 결코 그들만의 시대에만 유효했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안과 문제들도 그들이 성찰하고 해결을 시도한 문제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점에서, 고전은 역시 시대를 연결시켜주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울림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이가 들수록 절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세속적 가치에 대한 의미부여의 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에 너무 집착하면 추하고, 그렇다고 세속적 가치를 너무 경원시하면 현실감이 없어지는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이 들고 세상을 알아 갈수록 ‘진정성’을 가지고 정의와 원칙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손해를 보고,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바꾸고 ‘속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이들이 이익을 본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우리네 삶에서 ‘진정성’이 번번이 ‘속물성’에게 밀리고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속물성’만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 우리가 내면 깊은 곳에 ‘진정성’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양심이 있고 우리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지위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문전에 사람들로 가득차고(문전성시 門前成市), 세속적인 지위와 돈을 잃으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었더라도 그의 대문 앞은 새그물을 칠 정도로 한산해지는 것(문전작라 門前雀羅)이 세태라는 것은 기원전에 사마천이 사기 ‘급정열전’을를 통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사마천은 ‘급정열전’에서 언급한 속물적인 세태에 대하여 ‘맹상군열전’에서 아침시장과 저녁시장을 예로 들면서 속물적인 세태에 대하여 자기중심을 잡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기원전부터 사마천은 물론 한비자도 ‘교사(巧詐)’와 ‘졸성(拙誠)’ 중 ‘졸성(拙誠)’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으며(巧詐不如拙誠), 주자도 ‘사(史)’와 ‘야(野)’ 중 ‘야(野)’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결국 사람관계에서 가장 강조하는 의미는 ‘진정성’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성’은 통속성으로 메마른 우리 인생을 촉촉이 적셔줄 반드시 길어 올려야 하는 마중물이기 때문이다.

진정성과 속물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순환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진정성 있는 선한 모습과 속물적인 악한 모습의 이중성을 동시에 갖고 있을 수 있다. 각자의 삶의 과정에서 저마다의 구체적 상황에 처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속물적인 모습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고통과 피해에 대해 공감능력과 피해 감수성을 가진 선한 사람이자 주변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우리가 어떤 가치관으로 내 자신을 성찰하고 주위와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유홍준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문화유산을 바라보면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이게 된다.’라는 취지로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을 각색 인용한 글귀가 있다. 이 글귀는 음미할수록 공감이 가고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어서 좋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아는 만큼 보이고 깊어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비로소 그 이전과 다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비단 사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을 포함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도 이 글귀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 전과 같지 않으리라.’

김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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