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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대한 나의 그리움
최 경 천

구림서 낳고 영보에서 자람
전 KBS광주총국 아나운서 부장
전 호남대학교 초빙교수
국제로타리3710지구 사무총장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약 2년간 근무했다. 2년간 모두 고2 담임을 했다. 1969년도 모 고등학교 재직 시의 일이다.

나의 학급 종례는 이채를 띠었다. 놀이가 있는 종례였다. 매일이 그런 것은 아니고 학번의 짝수·홀수로 나누어 팔씨름도 하고, 닭싸움도 했다. 운동장에 나가 2인3각 릴레이도 했다. 놀이에서 이긴 쪽은 그냥 귀가를 하고, 진 팀이 청소를 했다. 청소를 재미있게 하는 것이 큰 효과였다.
‘다음에는 이기자’며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를 했다.

중간고사나 월말고사가 끝나면 성적순으로 20등까지 남고 21등부터는 귀가하도록 했다. 내 경험으로는 성적이 낮은 사람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반대였다. 성적이 좋은 사람이 남아서 청소를 하고 성적이 낮은 사람은 어서 가서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다.

청소를 않으니까 좋다고 가는 학생도 있었겠지만 뜻있는 학생들은 깊은 반성을 하면서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이를 갈며 하교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 달에는 ‘나도 청소를 해야지’ 하면서 뜻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반면 20등까지의 학생들에게는 다음 달에도, 다음 중간고사 후에도 청소를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독려했다. 청소를 쉽게 그리고 능률 있게 했다. 몇 달이 지나니 우리 반의 평균 점수가 다른 반에 비해 월등하게 좋아졌다.

요즘에 쓰는 말로 하자면 역발상(逆發想)-발상의 전환이었다. 남이 하지 않을 때 아무도 하지 않은 방식, 즉 넛지(Nudge)의 이론 가운데 한가지 였다. 어쩌다 성적이 쳐져 청소를 않고 귀가하던 학생 중에는 그 뒤에 이를 갈며(?) 공부에 집중하여 나중에는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로 지낸 졸업생의 경험담이 이 글을 쓰게 했다.

나는 사실 교직을 떠나 방송계에 뛰어들어 우리 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결과로 나를 국문과 출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사실 나는 지리학과 출신이다. 나는 광주교원원수원에 나가 국어과 교사를 위한 연수과정의 강사를 맡기도 했다. 중등학교 국어과 교육과정 연수(1994,12) 중등학교 1급국어 정교사자격 연수과정(2003, 8) 독서교육과 문학기행(2003,1) 등에서 우리말과 화법에 대하여 강의를 했다. 학교의 교사는 아니었어도 교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했으니 대리만족은 무리가 아닐 것 같다.

나는 방송인으로 30여년을 보냈지만 내 직무수행의 상당한 가치는 교사 적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학교요 방송이 청취자에게 정보와 지식을 전하는 기능이 있으니 간접(?)교사라 말하면 어울리지 않을까!

나는 방송계에 있으면서도 교사의 길을 잊어본 적이 없다. 훌륭한 교사는 자기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을 믿고 이에 동의하면서 최대한의 창의성과 실용성을 추구했다.

교육이란 인간발달을 인간이 의도적으로 지도하며 향도(嚮導)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강한 자극을 주어서 순(純)해진 감각을 일깨우고자 했다. 사회적 접촉의 기회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요구나 관념을 만들어 내는 한편 새로운 자극으로 행동의 변화를 꾀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50년 전의 일이다.

교육은 구체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전개되고 있으며, 영향을 주고 격려해주는 존재가 교육자라면 학교 교사 아닌 일반 사회인이 실은 훌륭한 교사 또는 교육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직을 떠나서도 의식의 원천을 잊지 않고 지냈다. 고마우신 시청자 또는 청취자 여러분은 제자 이상으로 귀하신 분들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2년이란 짧은 교직의 경험이 이후의 방송계 활동에 밑거름이 되었음을 밝히며 그때의 기억이 소중하여 본란 ‘낭주골’에 담아본다.

최경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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