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 호 신북면 행정리生 법무법인 이우스 대표변호사 민변 광주전남지부 지부장 전라남도 행정심판위원 소청심사위원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노와 갈등의 근본원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자기와는 다른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적 태도가 필요하다. 나아가 사회구성원 사이에도 나와 다른 의견과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가 절실하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회단체나 정치단체 사이에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서로가 공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본적 태도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라나 민족의 차이나 문명과 종교, 인종의 차이에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관용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호(好), 불호(不好)’와 ‘선(善)과 악(惡)’으로 구분하고 차별이나 상대에 대한 공격의 행태로 나아가게 되면 나찌와 같은 극단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노자 연구가인 최진석 교수는 ‘생각하는 힘 노자’라는 책에서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때 그 진실이 아직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반대편의 힘과 함께 작동하지 않으면 그 확신은 한쪽으로 치우진 믿음이기 쉽다. 대립면의 긴장이 주는 탄성을 잃은 모든 일은 한쪽으로 치우진 믿음(선입견, 편견, 광신)이기 쉽다.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전제하는 내공을 발휘해 긴장을 유지할 때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진실의 힘이다.

확신하지 않는 힘이 바로 내공이다. 내공은 대립면의 긴장을 품고 있을 때, 대립면의 경계에 설 수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최 교수의 지적도 같은 취지라고 보인다.
몇 해 전 영화 ‘300’을 보면서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야기를 채우는 내용이 전혀 상반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록 흥행에는 성공한 역사를 다룬 오락영화였지만, 영화내용 자체는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부분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의 입장에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물리쳐야 할 이민족이자 이질적 문명의 ‘악’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시각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치하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이나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에서 시라카와 등 일본군 지휘부에 대한 폭탄투척 행위는 국권을 회복하려는 우리민족의 입장에서는 민족정기를 만천하에 표명하는 ‘의거’이지만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과격분자들의 ‘테러’라고 폄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고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역사적 서술내용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후예인 현재의 남미국가들 입장에서는 서방 세계로부터의 침입일 뿐이라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할 수 있다.

콜럼버스의 1492년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은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문명인이 아니고 야만인이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에서는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라는 스페인이나 포르투칼 등 서구의 시각으로만 우리가 그동안 세계 역사를 바라보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는 ‘나’와 ‘상대방’이 다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모든 사회 현안에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나뉠 수 있고, 서로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러한 개개인들의 의사가 모여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러한 토대위에 언제든 다수와 소수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사회가 건강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는 그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사회 안에서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