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전 광주 서광초등학교 교장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교직 20년이 되던 해였다. 시골에서 10년을 근무하다 광주로 전입했다. 광주로 전입하기가 매우 힘든 시절이었다. 같은 해에 들어온 친구 교사 네 명과 유독 친하게 지냈는데 나이가 엇비슷했고 뜻하는 바가 같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력 15년차라 모임에서의 대화는 주로 승진이야기였다. 그 친구들은 벽지에서 고생을 하고 전입했기 때문에 승진의 길이 쉬었다. 그러나 나는 승진을 크게 좌우하는 벽지점수가 없어서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 친구들과 자주 만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가슴앓이를 했다. ‘나도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든지 승진을 하겠다고’ 모임에 다녀와서 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책보는 시간을 늘리고, 글쓰는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여 년 동안을 준비하여 시 장학사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경기장에 뛰어든 투우사처럼 용감하게 시험장에 들어섰다. 1교시에 논술시험이 있었는데, 600자 원고지에 1천800자 분량의 글을 진술하는 것이었다. 평소 연습했던 주제가 출제되어 나름대로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있게 작성하였다. 쓴 글을 점검하면서 수성펜을 오른손에 끼고 답안지를 넘기다가 펜 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답안 글씨 이외의 다른 표기는 무효처리가 되기 때문에 시험관에게 물었다. “점검하다가 답안지에 펜 자국이 생겼는데 그대로 제출해도 될까요?”

시험관이 내 답안지를 점검하고 나서 600자 원고지 한 장을 나머지 시간에 다시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글씨가 엉망이었고 점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제출했다. 이렇게 실수를 하고 나니 2교시부터는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해도 합격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인데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길은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닌가 보다.’라고 자책하면서 포기하고 있을 때에, 알고 지내는 시험관 한 분이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으니 다시 도전해 보라고 알려 주었다.

그 후, 승진의 길인 장학사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특수학교로의 전입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방학이면 쉬지 않고 대학을 찾아다니며 연수를 받고, 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 계절제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3년을 수학하여 졸업을 했다. 특수교사 자격을 갖추고 특수학교로만 전입하면 승진이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요행히 99년 3월 S특수학교로 전입했다. 승진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이 한걸음 가까워졌다. 그러나 특수학생을 지도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두 달을 근무하고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는지 스트레스와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 아이들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구안와사(안면신경 마비)라는 병에 걸려 고생하며 모든 일을 포기해야 했다.

꿈을 포기하니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 우선 마음을 비우고 치료에 집중했다. 매사를 체념하며 100여 일간을 치료하였다. 그러던 중에 또 장학사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많은 인원을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건강이 어려운 상태인데도 시험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 동안 공부했던 것이 아쉬워 포기할 수 없었다. 망설이고 있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뻘뻘 땀을 흘리며 힘들게 높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땀을 훔치며 갈 길을 살피는데 산꼭대기에 큰 묘가 보였다. ‘누가 이렇게 높은 산에 조상을 모셨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저곳을 쳐다보니 배를 깎아서 접시에 올려놓았고 이곳을 보니 고기를 구워서 적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떡도 괴어 놓았다. 마치 내가 큰 제사상에 올라온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더 이상 올라가면 죽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급히 하산하여 산의 중턱쯤에 내려오니 앞이 훤한 아스팔트길이 보였다. ‘진즉 내가 이 길을 선택할 걸.’ 그 길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으니 봇짐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하였다.

이런 꿈을 꾸고 나서, ‘힘들고 어려운 특수학교에서 계속 근무하여 승진할까? 장학사 시험을 다시 봐야할까?’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 
“시험에 합격해도 주님의 뜻, 떨어져도 주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신부님 격려의 말씀에 힘입어 그날부터 새로이 시험준비를 하여 남은 20여일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어렵사리 장학사 시험에 합격했다. ‘조상님이 꿈으로 알려 주셨던 음덕으로 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그 후, 장학사 시절, 힘들고 업무는 가혹했으나 참고 견디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관내 초등학교 영어노래 경연대회’를 진행하고 마무리 단계에서 큰 실수를 하였다. 각 학교 경연결과를 채점한 기록지 계산 과정에서 인턴교사가 컴퓨터를 이용해 빨리 처리하다가 계산이 틀린 것이었다. 편리하다고 생각한 컴퓨터만을 믿고 기계가 발생시킬 오류를 생각지 못하였다. 내 손수 계산기로 확인하지 않고 우수학교를 수상하고 말았다. 결과는 엄청난 실수였다. 1년 동안 피나는 연습의 결과가 다르게 채점되어 수상되었으니 주워 담을 수 없는 크나큰 실수였다. 그 일을 수습하는데 마음고생이 매우 컸다.

전날 밤, 조상님들이 하얀 소복차림으로 줄줄이 앉아 계셨다. 내가 그 앞을 지나는데 손가락질을 하며 훈계하셨다. 꿈을 꾸고 나니 기분이 언짢았으나 별일 있겠느냐고 속단하고 말았다. 조상님들이 꿈에 보이면 각별히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데…,

인연의 끈으로 묶인 조상님들은 나의 중요한 일을 관장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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