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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애절한 사랑
서 일 환

서호면 산골정마을生
전 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광주전남의료발전협의회 회장
상무힐링재활병원 행정원장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밧괴 심거 두고 보쇼서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 소셔

함경도 홍원 출신의 여류 시인이자 경성 관아의 기생 홍랑(洪娘)이 한양으로 떠나가는 최경창에 보낸 연정가(戀情歌)이다. 최경창은 병마절도사의 부관인 정6품 북도평사(北道評事)로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던 도중 홍원에서 홍랑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을 시작했다. 최경창이 이듬해 한양으로 돌아가자 홍랑은 함관령(咸關嶺)까지 따라가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조선에는 ‘양계지금(兩界之禁)’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백성들은 한양도성 출입이 제한됐고 관기(官妓)는 해당 관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홍랑은 최경창이 한양으로 돌아가서 병으로 몸져누웠다는 풍문을 듣고 한양까지 올라가서 간병을 하였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 옛 노래 부르지 말라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전라도 영암출신인 삼당시인 최경창(崔慶昌)이 함경도로 돌아가는 홍랑에서 보낸 송별가(送別歌)이다. 최경창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국상 중에 양계지금을 어기고 기생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간호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면됐다. 다시 사간원 정언, 영광군수, 대동도찰방에 이어 선조의 특명으로 종3품 종성부사로 복직됐다. 최경창은 북도평사의 무고를 받고 대간들이 승진을 문제 삼아 종5품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됐다. 상경하던 도중 45세의 나이로 객사하여 파주에 묻혔다.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얼굴에 숯검정 칠을 하여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홍랑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들고 함경도로 떠났다. 7년 만에 전쟁이 끝나자 목숨 걸고 지켜온 최경창의 유작들을 해주최씨 문중에 돌려주고 최경창의 무덤 옆에서 자결했다. 해주최씨 문중에서 홍랑의 의리와 절개를 인정하고 최경창과 부인 선산임씨의 합장묘 아래에 홍랑의 장사를 지냈다. 홍랑은 노래, 춤, 그림, 글씨, 시문에 능했으며 재색이 뛰어났다.

최경창은 정3품 영변대도호부사를 역임한 최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년간 영의정을 역임한 청백리 박순의 문인으로 청백리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수학했다. 최경창은 관료적인 송시(宋詩)를 벗어나 서민적인 당시(唐詩)를 지어 백광훈, 이달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또한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 송익필, 이산해, 최필 등과 함께 팔문장계(八文章系)로 불렸다. 최경창은 사후에 정2품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됐다. 강진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모셔져 있다.

최경창은 파주에서 광주목사 임구령의 사위가 되어 처갓집인 영암 구림마을에 정착했다. 구림마을은 도선국사의 탄생 유래에서 비둘기 ‘구(鳩)’와 숲을 뜻하는 ‘림(林)’을 써서 구림(鳩林) 마을이 되었다. 1907년 구림마을 최만리, 최경창, 최연징, 최치헌 4위를 동계사에 배향하고 고죽시비를 세웠다. 앞쪽에는 고죽시비(孤竹詩碑), 뒤쪽에는 홍랑가비(洪娘歌碑)라는 시비를 세웠다. 최경창의 후손들이 1969년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라고 묘비를 세웠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更二夫)이라’고 하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암 사람들은 열녀 홍랑 덕분에 선비 최경창의 소중한 문집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음에 대해 깊은 감사를 올려야 한다. 전라도 영암출신의 선비 최경창과 함경도 홍원 출신의 관기 홍랑의 아름다운 사랑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하고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서일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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